[동 추 거문고 이야기] 〈23〉 사마상여의 녹기금

  • 김봉규 문화전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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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12-20  |  수정 2024-12-20 08:26  |  발행일 2024-12-20 제16면
중국판 러브스토리 '오작교'는 녹기금 선율
[동 추 거문고 이야기] 〈23〉 사마상여의 녹기금
중국 전한(前漢) 시대 문인인 사마상여(司馬相如·기원전 179∼117)는 쓰촨성(四川省) 청두(成都) 출신으로, 중국 문학사에서 한부(漢賦)의 대표적 문인이다. 한나라 무제는 수려한 문장이 특징인 그의 작품 '자허부(子虛賦)'와 '상림부(上林賦)'를 특히 좋아했다. 한부는 한나라를 대표하는 문학 장르인 부(賦)를 말하는데, 운문 형식을 띤 산문이다.

남다른 글재주로 시문에 능했던 사마상여는 거문고(중국 칠현금)에도 뛰어났다. 그가 연주하던 거문고의 이름이 녹기금(綠綺琴)인데, 중국의 대표적 명금(名琴) 중 하나로 널리 알려진 녹기금은 거문고의 별칭으로 사용될 정도로 유명했다.

사마상여의 명성을 듣고 그를 흠모한, 한나라 경제(京帝)의 동생인 양왕(梁王) 유무(劉武)가 그에게 글을 요청하자 상여는 '옥여의부(玉如意賦)'를 지어주었다. 왕은 기뻐하며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거문고 '녹기'를 그에게 선물했다. 대대로 전해진 이 명금에는 '동재합정(桐梓合精)'이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즉 이 거문고는 오동나무와 가래나무를 사용해 만든 것이었다.

사마상여는 이 거문고를 얻은 후 보배처럼 여겼고, 그의 뛰어난 연주에 녹기의 특별한 음색이 어우러지면서 녹기금은 더욱더 유명해지게 됐다.

[동 추 거문고 이야기] 〈23〉 사마상여의 녹기금
중국 청두 중심거리에 있는 사마상여와 탁문군 조형물. 거문고를 연주하는 사마상여와 탁문군, 봉황의 모습을 함께 형상화했다.
◆사마상여와 탁문군

글재주는 있었지만 가난한 시인 선비였던 그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면서 유명 인사가 된 것은 탁문군과의 사랑 이야기 덕분이었다. 중국의 대표적 사랑 이야기 주인공인 사마상여와 탁문군의 사랑이 맺어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사마상여의 거문고 연주였다.

사마상여는 어릴 때부터 책을 읽고 악기를 다루길 좋아했다. 자신의 문재(文才)에 대한 자신감도 컸다. 당시 관리가 되려면 돈을 내어 자리를 얻는 것도 한 방법이었는데, 사마상여도 집안 재산을 모두 팔아 관직을 얻었다. 하지만 한나라 황제였던 경제는 시문에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 자리를 내놓고 문인을 우대하던 경제의 동생 양왕 유무에게 의탁했다. 불행하게도 양왕은 얼마 뒤에 사망했고, 사마상여는 고향으로 돌아가 가난한 생활을 하는 상황이 됐다. 가산을 모두 정리한 터라 궁핍한 생활로 연명해야 했다.

어느 날 린충 현의 현령인 왕길이 찾아왔다. 그는 사마상여의 재주를 알아보고 아끼고 있었다. 친구인 왕길은 사마상여에게 린충으로 내려와 같이 지내자고 말했다. 달리 살 방도가 없던 사마상여는 제의를 받아들였다. 린충은 쓰촨 남부에서 청두로 들어가는 교통의 요지였다. 따라서 상업이 발달했고 부자가 많았다.


전한시대 문학 한부 대표적 문인 사마상여
탁문군에 반해 청혼詩 읊으며 거문고 연주
가난한 선비와 절세미인 '사랑의 야반도주'

후에 한무제 즉위로 총애 받게 된 사마상여
조정 출사해 벼슬 높아지자 첩 들이려 해
이별 고하는 아내 탁문군 詩 받고 욕심 버려



그중 탁왕손이 가장 부유했다. 거대한 저택과 수백 명에 달하는 노비가 있었다. 어느 날 탁왕손이 연회를 열었다. 탁왕손은 왕길과 사마상여를 주빈으로 초대했다. 왕길은 사마상여에게 탁왕손의 딸 탁문군(卓文君)에 대해 미리 귀띔했다. 탁문군은 천하절색에다 시문에 능하고 악기를 잘 다루었다. 그녀에 대한 소문은 사마상여도 들어 알고 있었다. 탁문군은 16세 때 아버지가 정해준 부자 아들과 결혼했다. 하지만 남편은 몇 개월 만에 병으로 죽었고, 청상과부가 되어 친정으로 돌아와 머물고 있었다.

'문군은 용모가 아름다웠다. 눈썹은 마치 먼 산을 바라보는 것 같았고, 빰은 마치 연꽃과 같았으며, 살과 피부는 부드럽고 윤기가 도는 것이 부용과 같아 열일곱 나이보다 앳되어 보였다.' 탁문군의 미모를 묘사한 이 글에서 중국 미인의 조건인 '먼 산을 바라보는 듯한 둥근 눈썹(遠山眉)' '연꽃같이 붉은 빰(蓮花頰)' '부용 같이 부드러운 피부(芙蓉膚)'라는 말이 나왔다.

연회가 시작되자 탁왕손과 왕길은 사마상여에게 거문고 연주를 청했다. 사마상여는 연회장 밖에서 탁문군이 자신을 엿보고 있는 것을 눈치 챘다. 그녀의 마음을 얻으려는 사마상여는 직접 한 편의 시를 지어 읊으며 거문고를 연주했다.

그 시가 유명한 '봉구황(鳳求凰)'이다. 여기서 봉은 사마상여 자신을, 황은 탁문군을 가리킨다. 사마상여는 '봉구황'을 통해서 한 쌍의 봉황이 서로 마음껏 사랑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노골적으로 내비쳤다.

'봉(鳳)이여, 봉이여 고향에 돌아왔구나/ 너(凰)를 찾아 사해를 헤맸지만/ 때를 못 만나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오늘 밤에 이 집에 올 걸 어찌 알았겠는가/ 아름다운 낭자가 규방에 있는데/ 방은 가까워도 사람은 멀어 애간장이 타는구나/ 어떤 인연이면 그대와 한 쌍의 원앙이 되어/ 함께 저 높은 하늘을 날 수 있을까// 황(凰)아, 황아 나에게 깃들어/ 꼬리를 맞대고 오래 오래 사랑 나누어 보세/ 정 나눠 몸과 마음 하나 되어/ 밤늦도록 서로 따른들 누가 알겠는가/ 두 날개 활짝 펴고 하늘 높이 날아올라/ 더는 나를 슬프게 하지 마오'.

◆함께 야반도주한 두 사람

사마상여의 '봉구황'을 듣고 바로 그 뜻을 알아챈 그녀는 모든 면에서 출중한 사마상여의 매력에 빠지게 됐다. 그날 밤 사마상여에 대한 연모의 정을 더 이상 참지 못한 탁문군은 상여를 찾아가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다. 17세의 탁문군과 30대 중반의 상여는 밤을 새우며 사랑을 나눴다.

하지만 둘의 사랑이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임을 안 두 사람은 모두 잠든 틈을 이용해 상여의 고향인 청두로 야반도주를 하게 됐다. 탁문군과 사마상여가 말을 타고 달려 쓰촨성 청두로 돌아왔으나 그 집은 너무나 빈한했다. 집에 있는 것이라고는 네 벽뿐이었다. 고사성어 '가도사벽(家徒四壁)'이라는 고사성어가 여기서 나왔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중 '사마상여열전(司馬相如列傳)'에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무작정 도망쳐 나왔지만 견디기 어려운 생활여건을 본 탁문군은 린충으로 돌아갈 것을 청했고, 사마상여도 어쩔 수 없이 탁문군의 뜻을 따랐다. 탁문군은 린충에서 친척에게 돈을 빌려 작은 우물 옆에서 술집을 열었다. 두 사람은 직접 술을 빚었다. 탁문군은 손님을 상대하며 술을 팔았고, 사마상여는 음식을 나르고 설거지를 했다. 두 사람은 가난했지만 하루하루 행복하게 살았다.

탁왕손은 술장사를 한다는 소식에 처음에는 노발대발했으나, 친구의 충고를 따라 결국 사마상여와 탁문군에게 넉넉한 돈과 노비, 물품을 주었다. 그 덕분에 두 연인은 술집을 닫고, 청두에 집과 땅을 샀으며 혼례도 올렸다.

[동 추 거문고 이야기] 〈23〉 사마상여의 녹기금

마침 한 황실은 한경제가 죽고 한무제가 즉위해 있었다. 어느 날 한무제는 우연히 사마상여가 지은 '자허부(子虛賦)'를 읽었다. "글 솜씨가 가히 선인의 경지에 이르렀구나"라면서 단번에 매료되고 말았다. 신하 중 한 사람이 같은 고향 사람이라며 사마상여를 천거했고, 한무제는 그를 바로 낭관으로 임명했다. 한무제의 총애를 받아 조정에 출사하고 경제적으로도 윤택해지자 사마상여는 첩을 들이려 했다. 자신에 대한 사랑이 식은 걸 직감한 탁문군은 슬퍼했다. 그리곤 시 한 수를 지어 사마상여에게 주면서 헤어지자고 했다. 그 시가 유명한 '백두음(白頭吟)'이다. 백두음을 읽은 사마상여는 옛 일을 떠올렸고, 첩을 들이려던 생각을 접었다.

사마상여가 탁문군의 마음을 얻기 위해 연주한 거문고 '녹기'는 이후 많은 시인들이 시를 지을 때 거문고를 대신하는 단어로 사용하게 됐다.

글·사진=김봉규 문화전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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