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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교대 명예교수〉 |
우리는 매일 반복적인 삶을 산다. 우리는 평생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방식으로 세수를 하고 매일 똑같은 아침 식사를 한다. 그리고 같은 버스를 타고 같은 사무실로 출근한다. 같은 사람들을 만나고 같은 일을 하고, 그리고 다시 같은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집에는 같은 남편이나 아내가 기다리고 있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삶'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아! 잠시라도 깨어있는, 의식적인 삶을 살아볼 수 없을까?
여행은 이를 가능하게 해 준다. 우리는 아파트 정원에 있는 목련 꽃봉오리가 부드러운 연두색 껍질을 벌리고 하얀 꽃잎을 힘껏 펼치는 것을 깨어서 바라보지 못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탄 버스가 대구를 벗어나 고속도로를 달릴 때 차창 밖 멀리 스쳐 지나가는 벚꽃과 진달래는 문득 우리 마음을 끌어당긴다. 여행은 우리를 무의식적이고 습관화된 삶, 반복적인 삶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 반복적인 것은 우리의 마음이지 세상이 아님을 비로소 발견하게 된다.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우리는 새로운 눈으로 일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목련 꽃봉오리가 떨어지고 푸릇푸릇한 새순이 돋아나는 것이 비로소 우리 눈에 들어온다. 아내의 표정이 매일 변하고, 눈가의 주름도 수시로 변하는 것도 새롭게 알아차린다.
무의식적이고 습관화된 삶은 시간을 빠르게 흐르게 한다. 그렇지만 비록 일주일간의 짧은 여행이었지만 여행에서 돌아오면 마치 한 달쯤 지난 것처럼 느껴진다. 여행이 시간을 천천히 흐르게 하는 까닭은 인식하는 정보의 양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반복적인 일상에서 접하는 정보는 무의식에서 자동으로 처리된다. 하지만 여행에서 새롭게 만나는 풍경이나 사물은 생생하게 살아서 우리의 인식을 끌어당긴다. 정말로 압도적인 풍경이나 장면을 목격했을 때는 자아가 사라지고 시간도 멈춘다.
여행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바깥의 다양한 볼거리이지만, 사실은 생생하게 살아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다. 우리는 여행을 통해 그동안 얼마나 스스로 속박하고, 학대하고, 경멸하며 살아왔는지를 느낄 수 있다. 낙안읍성에서 만난 아름다운 광대나물꽃 한 송이에 감탄하는 나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송광사 학승의 법고 치는 소리를 귀 기울여 듣는 나는 얼마나 천진스러운가? 강진 청자 마을에서 도자기에 정성껏 문양을 새기는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보길도 여차 몽돌 해수욕장을 혼자 거니는 나는 얼마나 외롭고 쓸쓸한 존재인가? 친구의 말 한마디에 천국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하는 나는 얼마나 사랑스러운 존재인가?
여행은 우리의 눈을 활짝 열어 두껍고 딱딱한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어준다. 모든 것이 변하지만 그동안 우리는 그 변화를 볼 눈이 없었다. 세상에 오래된 것은 없다. 모든 것이 새로우나 오래된 눈으로는 그 새로움을 볼 수 없다. 이제 나뭇잎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한 줄기 햇살에, 목덜미를 어루만지는 부드러운 바람에, 깔깔거리며 즐거워하는 동료의 목소리에, 아침을 못 먹고 허기져 들어간 강진 어느 식당의 풍성한 음식에, 언제나 쉽게 감동하는 나를 만날 수 있다.
여행은 내가 나임을 알게 해 준다. 나는 이 세상의 무한한 존재 중에 유일한 존재임을, 누구도 나의 존재를 대신할 수 없음을, 동시에 이 세상의 모든 존재와 연결된 존재임을, 내가 모든 것 안에 있듯이 모든 것이 내 안에 있음을 자각하게 해 준다.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은 풍성한 선물 꾸러미를 가지고 돌아온다. 그 속에는 가지가지의 색으로 포장된 사랑이 가득 들어있다. 우리는 그 사랑을 추억이라고 부른다. 그 추억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물론 자신에 대한 사랑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가슴속에 사랑이 존재해야 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은 세상을 아름답게 보게 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은 샘물처럼 넘쳐 그 사랑이 필요한 곳이면 어디로든 흘러간다.
덤으로 여행은 내가 여행을 출발했던 바로 그곳을 그리워하게 한다. 허름한 아파트지만 그래도 이곳이 내가 묵었던 오성급 호텔보다 더 편하고 안락한 십성(十星)급 호텔임을 깨닫게 해 준다.〈대구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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