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검·경 출석조사만 받아도 ‘입건’한다니 말이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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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9-14   |  발행일 2020-09-14 제27면   |  수정 2020-09-14

내년부터 범죄와 관련이 없어도 검찰이나 경찰에 출석해 조사를 받으면 ‘피의자’ 신분으로 전환된다. 새로운 검·경 수사준칙에 ‘입건’(수사 개시) 기준이 신설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수사준칙을 다룬 기존 법령에는 없던 부분이다. 오는 16일까지 입법 예고기간을 거쳐 내년 1월1일부터 시행된다. 현재는 출석조사를 받아도 수사관이 범죄혐의가 없다고 판단되면 입건하지 않고 ‘내사 종결’할 수 있다. 내사는 범죄에 관한 정보취득이나 익명의 신고, 진정, 풍문 등을 듣고 수사기관 내부에서 행하는 조사활동의 하나로, 범죄사건부에 등재돼 사건번호가 부여되는 수사와는 다른 개념이다. 입건은 정식 수사개시의 단계로, 입건되면 피혐의자는 피의자가 된다.

피혐의자가 출석조사를 받으면 바로 입건처리되는 것은 무분별하게 피의자를 양산할 수밖에 없다. 범죄 관련성이 없거나 악의적인 진정사건의 피혐의자라도 출석조사만으로 입건되기 때문이다. 가출사건·교통사고 목격자 등도 출석조사를 받으면 입건된다고 하니 내년부터 어느 누가 수사기관에 가서 진술을 하겠는가. 입건되면 공무원의 경우 소속기관에 10일 내에 통보되며, 무혐의 처리돼도 수사경력자료에 기록이 남는다고 하니 기가 막힌다. 다만 피의자로 자료에 남겨지지 않으려면 경찰이 방문 조사를 해야 한다는 단서를 뒀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내사에 따른 불합리한 폐해를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지만 실제로 부작용이 너무 크다. 경찰이 이 같은 부작용을 예상하고 수사준칙 개정을 요구하는 것은 이치에 맞다. 검·경 수사권 조정으로 인한 부작용이 이뿐만이 아닐 텐데, 법무부와 행정안전부는 손을 놓고 있다. 백신·치료제 개발과정을 보더라도 동물실험에 이어 수차례에 걸친 임상시험을 통해 안전성을 확보한 뒤 인체에 투여한다. 하나 모든 국민을 잠재적 범죄인으로 취급할 수 있는 새로운 검·경 수사준칙을 그대로 시행한다는 것은 국민을 법률실험용 모르모트로 여기는 것과 다름이 없다. 법무부 장관 한 명 구하려 용쓰는 것보다는 전 국민을 범죄자 취급하는 새로운 검·경 수사준칙을 개정하는 것이 보다 시급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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