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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가 고백으로 터닝할 때가 있다.
이런 시(詩)는 둘 중 하나다.
시에 직관이 들어왔거나 아니면 더 이상 깊어질 시적 수심을 잃어버리고 매너리즘에 빠졌을 경우다. 원로시인일수록 후자로 잘 기운다. ‘대저 세상은…’, 뭐 대충 이런 톤으로 나오면 시혼은 깃들기 어렵다. 시는 ‘섬뜩한 질문과 발견’. 일장춘몽식의 대답은 아니다. 시인은 일상을 전복하려는 ‘미학적 테러리스트’. 그런데 언젠가부터 놀라움과 경이로움의 시혼을 보기 어렵단다. 목숨이 아니라 열정만 걸기 때문이거나 아직 시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올해 환갑을 맞는 박진형 시인.
‘각혈’ 같은 성정 때문에, 또 ‘독학처사’ 형세라서 누구에게도 검열당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는 대구시학(大邱詩學)의 영광을 재현시키고 싶어한다. 이상화, 이장희, 백기만, 신동집, 김춘수, 박목월, 유치환…. 지난 시절 대구를 시(詩)의 도시로 만들었던 거장. 하지만 지금은 대구도 중앙시단에 연연해 한다. 그게 속상하다. 그래서 지난 10년간 남들은 ‘밑빠진 독에 물붓기’라 해도 개의치 않고 팔리지도 않는 시집을 직접 인세까지 줘가며 만인시인선 50권을 탑처럼 세웠다.
대구향교 옆 만인사 사무실 2층 사랑채에서 그를 만났다.
◆방송국 구성작가에서 출판사 직원으로
-어떻게 등단했나.
“열 번 이상 중앙지 신춘문예에서 깨졌다. 그때 보다 못한 박양균 시인이 나를 등단시켜주겠다고 작품을 달라고 했지만 안 주었다. 문예지 등단은 성에 차지 않았다. 신춘문예만 고수했다. 1985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됐는데 어이가 없더라. 같은 해 정 모 시인은 대구에서 깨지고 서울 중앙지에 당선되고 나는 서울에서 깨지고 대구에서 당선됐다. 등단이란 이렇게 아이러니한 구석이 있다.”
문학적 재주 탓인지 어느 날 대구KBS방송총국 구성작가로 들어간다. 2년 정도 있었다. 방송국 구성원고라는 게 너무 구어체였다. 문어체에 능한 그로선 방송국이 체질에 맞지 않았다. 결국 중구 봉산동 동아양봉원 옆에 있던 형설출판사에 입사한다.
-형설출판사도 한때 대구를 대표하던, 아니 전국적 명성을 가진 좋은 출판사였던 것 같은데.
“그렇다. 원류를 더듬어 보면 1950년 피란지 대구의 대표적 출판사였던 영웅출판사 한병용 사장 밑에서 일했던 장지익씨가 훗날 독립해 형설출판사를 오픈한다. 나는 그 밑에서 일을 배워 장 사장처럼 만인사로 독립했다.”
-형설 시절 식견을 많이 넓혔겠다.
“거기서 15년을 근무했는데 나는 그곳을 출판사라 하지 않고 ‘형설대학’이라고 했다. 수천권의 대학 교재를 만들면서 자연·사회·인문과학 관련 온갖 책을 다 섭렵할 수 있었다.”
-책이 곧 삶의 반려자였겠다.
“ 어느 날 아버지가 날 불렀다. 그때 난 2천권 이상의 책을 소장하고 있었다. ‘야야, 니는 평생 책과 함께 살아야겠구나’라고 한마디했다. 그 말이 아버지가 내게 남긴 유일한 유산, 아니 삶의 좌표를 정해준 말씀이었다.”
◆만인사 사장이 되다
91년에 회사를 그만둔다. 하지만 남 밑에서 모든 꿈을 펼칠 수가 없었다. 마흔 무렵에 현재 자리 근처에서 만인사를 오픈한다. 당시에는 한국델파이, 세강병원, 동원화랑 등 7여 군데의 사보, 카탈로그 등을 만들었다.
-시에 목숨을 더 걸어야 할 때인 것 같은데 너무 일찍 사업에 뛰어든 것 아닌가.
“어떤 사람은 직장을 잡으면 그때부터 시도 사망선고를 받는 줄로 아는데 나는 아니다. 일을 잠시 접으면 금세 시와 일심동체가 됐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서 첫 시집을 낸다. 등단한 지 10여년 만에 첫 시집 ‘몸나무의 추억’을 펴낸다. 민음사였다.
-서울에서 첫 시집을 냈는데 힘은 들지 않았는가.
“우여곡절이 많았다. 내주기 싫었던지 원고가 없어졌다고 해서 다시 적어 올려보내는 해프닝도 있었다. 그 과정에 깨달은 사실이 하나있다. 시집을 내기 위해 시간을 많이 잡아먹은 게 결과적으로는 좋았다. 역시 좋은 시집은 시간을 두고 숙성시켜야 한다. 홍어처럼 묵혀야 명품이 탄생한다.”
민음사는 당시 중앙에선 메이저급 문학 전문 출판사였다. 그곳 편집부에서 민음사 박맹호 사장을 만날 수 있었다. 시집을 내줘도 여전히 박 사장은 자신을 촌놈으로 보고 있다는 걸 감지했다. 이때 그가 쓴소리를 내뱉는다. “사장님, 민음사에선 내 시집을 내어줄 의무가 있습니다. 민음사는 적어도 한국의 어느 단과대보다 나은 민음대학입니다. 내가 거기 출신입니다. 민음사 모든 시집을 구입해서 다 공부했습니다. 당연히 내 시집을 내줘야죠.”
시인選 시리즈는 왜
중앙시단만 바라보는
지방문학 풍토 속상해
지방서도 제대로 된
시집을 만들어 보자
분명한 원칙
시인의 자존심 인세 지불
10년간 매년 5권씩 출간
가까운 지인이 청탁해도
내용 성에 안차면 거절
그것이 만인사의 정신
◆만인시인선 탄생 비화
어느 날 새벽 일찍 깬다.
지방에서도 제대로 된 시리즈 시집을 만들어보자고 결심한다. 지역에서 목숨 걸고 시에 매진하는 시인만을 위한 시집을 내주자고 맘을 먹는다. 그리고는 일본에서 출판디자인 관련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 당시 대구 최고의 북디자이너로 평가받던 박병철씨에게 세련된 표지를 부탁했다. 1년이 걸렸다.
-표지 디자인에 그렇게 공을 들인 이유는 뭔가.
“지역에서 나온 시집의 표지가 너무 안이하고 촌스러웠다. 표지에서부터 뭔가 달라야 된다고 믿었다. 고심해 만든 샘플 60개 중 6개를 엄선하고 그중에서 최종안을 정했다. 국내에서 시집에 원색 띠를 두른 유일한 시집이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 나중에 서울 몇몇 출판사도 우리 걸 벤치마킹했다.”
-1권 시인 선정도 꽤 고민이었겠다.
“1권 시인을 찾는 게 어려워 일단 비워두고 2권은 박주일, 3권은 이동순, 4권은 나로 정해져 있었다. 이하석 시인에게 ‘형님이 안 하면 만인시선 나도 안 한다’고 협박했다. 그렇게 해서 이 시인의 ‘고령을 그리며’가 첫 권으로 나왔다.”
-만인시선에도 기준과 원칙이 있을 것 같다.
“ 상당수 시인이 시집은 오직 서울에서 낼 때만 존재의의가 있다고 믿었다. 난 이 흐름을 타파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인세를 지불 해야한다고 믿었다. 인세는 시인에 대한 자존심이다. 하지만 인세는 지역은 물론 서울에서도 몇 군데 빼곤 상상하기 힘든 결정이었다. 1년에 한 5권 정도만 내자고 했다. 가능하면 주례사 같은 해설도 배제했다. 시인이 직접 시인의 산문을 적도록 했다. 맘에 안 들면 다시 퇴고를 여러번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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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만인사가 지난 10년간 역량있는 향토 시인들을 위해 인세를 지급하면서 발간해 온 50권의 시집. 그 두께가 대구시문학 지층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
-반응은 어땠나.
“서울의 한 출판사 관계자는 ‘박 시인은 유산을 많이 받아서 인세까지 지불하면서 시집을 내주느냐’고 날 비꼬았다. 자기는 어느 대가가 와도 돈 안 받고는 시집을 안 내준다고 말했다. 이게 현실이었다.”
-인세를 주니 여기저기서 청탁이 들어왔겠다.
“맞다. 하지만 부탁한다고 해도 편집위원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단호하게 거절했다. 모 대학 교수가 전화를 해서 원고를 보내왔다. 보니 아니다 싶어 거절했다. 지역에선 서로 알 만한 사이인데 나는 원칙을 고수했고 결국 사이가 소원해졌다. 당연히 반대파도 많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는 남의 말에 일절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고집과 자존심 때문이다. 그게 만인사의 정신이다.”
-흥미로운 시인들이 많이 참여했겠다.
“시집 외 오늘의 시 동인 선집, 오리시집, 대구여성시 20인선집, 현대여성시조 21인 선집 등을 통해 모두 100여명의 시인이 동참을 했다. 한글 사랑이 남다른 가톨릭대 제이슨 교수의 한국어로 된 시집도 있다. 장하빈 정유정 송광순 박상봉 김현옥 이경임 권세홍 이숙경 이익주 김상윤 등은 첫 시집을 냈다. 작고한 권국명 시인의 경우 서울에서 능히 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우리 집에서 세 권을 다 냈다. 노태맹의 경우 시를 숨겨두고 안 보여주어서 첫 시집 이후에 여러 차례 독촉을 해서 십수년 만에 두번째 시집을 낸 것도 기억에 남는다. 이정환 박기섭 문무학 이종문 김세진 이경임 이숙경 이익주 박영교 등 시조시인도 가세했다. 그런데 아직 박기섭 시인은 41권을 구상만(?) 하고 못내고 있다.”
-가장 어려웠던 순간
“사보시장도 붕괴되면서 경영이 악화되었다. 어느 날 ‘내가 지금 뭐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했다. 만인시선은 대구문학의 자존심이며 적어도 10년 후 대구 문학의 중요 텍스트인데 여기서 중단해선 안되겠다고 맘을 고쳐먹었다.”
-대구 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너무 늙어가는 것 같다. 좀 더 젊어져야 한다. 더 새로움에 대해 올인해야 된다. 아직도 지역 시집을 홀대한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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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형 시인은
경주시 서면 아화리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시마(詩魔)를 친견, 20년 이상 시환(詩患)을 앓는다. 1971년 구미공단 공돌이가 된다. 구미에서 ‘옥토 동인’이란 문학회도 만든다. 10여 차례 이상 중앙지 신춘문예 도전에 실패. 85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와 89년 현대시학 신인상을 통해 등단한다.
형설출판사를 거쳐 91년 출판사인 만인사를 연다. 2004년부터 자생적 지역 시집 출판 활성화를 위해 만인시인선을 기획한다. 올해 50권을 내고 재차 제2기 만인시인선 항로를 탐색 중이다. 그는 10여년간 고령의 행위예술가 윤명국 등과의 인연을 통해 퍼포먼스 문화에 심취한다. 그 과정에 우리 시단의 ‘말하기’ 위주의 시적 발화방식에서 벗어나 ‘보여주기’를 위한 ‘몸의 기호학’ 시대를 연 네 번째 시집 ‘퍼포먼스’를 2007년 출간한다.
◆취재후기
다들 그냥 쉽게 펴낸 50권인 줄 안다. 절대 아니다. 오는 3월 초 만인시선 50권을 기념하는 출판기념회가 열린다. 1차 대업을 달성하고 다시 2라운드를 향하고 있다. 1권을 낸 이하석 시인이 51권 ‘다시 고령을 그리다’를 준비 중이다. 온갖 상이 난무하는데 왜 출판문화상은 없는가. 위클리포유가 대신 만인사에 대구출판문화대상을 안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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