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문화예술의 뿌리를 찾아-대구예술의 토양을 만든 예술인 .3] 이인성·이쾌대

  • 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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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4-16   |  발행일 2014-04-16 제22면   |  수정 2014-04-16
천부적 재능, 대구 근대화단 함께 꽃피우다
한 살 차이…동시대 맹활약
활동기간 길지않은 공통점도
“유채화 통해 한국미술 정립”
“민족의식 내포된 작품”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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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작업실에서 포즈를 취한 이인성

대구지역 화단에서 처음 서양화에 관심을 갖고 작품을 그린 이는 이상화 시인의 형인 이상정 장군이었다.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던 이상정은 회화에 필요한 용구를 처음으로 외국에서 대구에 들여온 사람이기도 했다. 이렇게 시작된 향토화단은 일본으로 건너가 본격적으로 미술공부를 한 이인성, 이쾌대 등 걸출한 미술인을 통해 화려한 꽃을 피웠다.

1912년 대구에서 태어난 이인성은 당시 최고 권위를 자랑하던 관립 공모전람회인 조선미술전람회에서 18세의 어린 나이로 첫 입선한 뒤 마지막 23회까지 연속 입선, 특선, 추천작가로 이어지는 수직상승을 이어가며 한국 서양화단의 대표작가로 자리매김했다.

이인성보다 한 해 뒤에 태어난 이쾌대는 이중섭, 진화, 최재덕 등과 조선신미술가협회를 조직해 일본 도쿄와 서울을 오가며 동인전을 가지는 등을 통해 진보적 미술가로 활동했다.

천부적 재능을 타고난 두 화가는 태어난 시기가 비슷한 것은 물론 작품활동기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인성은 38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이쾌대는 6·25전쟁의 휴전 직후 월북해 한국화단에서 활동 기간은 비교적 짧다. 하지만 이들이 국내화단 발전에 미친 영향은 결코 적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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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성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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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성 작 ‘해당화’


#암흑기 대구가 낳은 천재 서양화가 이인성= ‘한국화단의 귀재(鬼才)’ ‘조선의 지보(至寶)’ ‘양화계의 거벽(巨擘)’. 이인성을 가리키는 수식어다. 불과 38년이라는 짧은 삶을 살았지만 일제강점기 한국 최고의 서양화가라는 칭호를 얻었던 이인성은 20년대 말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해 30~40년대 한국 미술의 발전에 큰 업적을 남겼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이인성은 25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세계아동미술전에 출품해 특선을 차지하면서 국내외에 이름을 알렸다. 그의 나이 14세였는데, 이로 인해 천재 소년화가로 일본 신문에도 소개됐다. 이후 그의 명성은 전국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가 주로 작품활동을 한 일제강점기는 문화의 암흑기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서양화가 도입되고 전통서화가 근대적 회화로 탈바꿈되는 등 미술표현에 있어 급격한 변화를 일으킨 시기였다. 특히 이 시기에는 일제가 22년 창설한 공모전람회, 즉 조선미술전람회를 매년 열고 이를 통해 미술활동이 총체적으로 이뤄졌다. 이인성은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최고의 두각을 나타낸 화가였다. 잇단 수상 성과를 통해 그 이름을 국내에 널리 알린 것은 물론 14회 때는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받아 천재성을 드러냈다.

두드러진 활약을 보였던 이인성을 서양화가로 키우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보내야 된다는 의견이 지역 유지 사이에 일어날 정도였고, 경북여고보(현 경북여고)의 일본인 교장이 후원자로 나서 도쿄로 유학까지 떠났다. 3년여의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대구에 최초의 양화연구소를 개소해 학생들을 지도했다.

유학생활을 통해 그는 수채물감으로 주로 풍경화를 그리던 초기화풍에서 벗어나 유채물감으로 인물을 본격적으로 그리는 변화과정을 보이면서 한국의 풍토감을 작품화하려는 노력도 보여줬다. 이인성의 업적 중 특히 조선의 향토색 구현에 힘쓴 점이 높이 평가받고 있다. 지역에서 결성된 향토회의 중심인물로 활동하면서 작업에 있어 원색의 사용, 곡선 묘사, 향토소재 사용 등을 통해 향토적 순수성을 담아내려는 노력을 보여줬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6·25전쟁 중에 38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그의 작품세계에 대해 미술평론가 이경성은 “이인성은 유채화를 통해 하나의 한국미를 정립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그의 수채화는 수채화만이 표현할 수 있는 유동적인 속도감과 세련된 감각을 여지없이 나타내 한국 수채화의 하나의 전형을 만들었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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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쾌대

#보기 드문 경향의 화업을 보여준 이쾌대= 1988년 월북작가에 대한 해금조치가 있기 전까지 이쾌대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동시대에 활동한 작가나 그에게 직접 회화수업을 받은 소수의 젊은 미술지망생 정도만 아는 작가였다. 이처럼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쾌대가 최근 새롭게 조명받고 있는 것은 유족들이 그의 작품을 잘 보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광복 전 세대의 작가들은 6·25전쟁 등으로 인해 당시 작품이 온전히 남아있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 이쾌대의 작품은 현재까지 상당수 남아있다. 특히 이쾌대의 부인 유갑봉은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이를 소중히 간직해, 그의 존재를 우리 미술사에서 되살아날 수 있게 하고 그의 연구도 이어갈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줬다.

칠곡 출신의 이쾌대는 30~40년대에 시대에 대한 통찰과 비전, 신비한 고전미와 모던한 감성, 주제에 대한 독특한 발상 속에 작업을 함으로써 한국 근대미술사에서 보기 드문 경향의 화업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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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쾌대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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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쾌대 작 ‘족두리’
지난해 이쾌대 탄생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와 특별전을 마련한 대구미술관은 한국미술사에서 이쾌대가 차지하는 비중에 대해 “그는 광복 후 정치,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운 현실에서 그 시대정신을 담아낸 화가이다. 88년 월북화가 해금을 통해 그가 세상에 드러났을 때 비로소 해방공간 시기의 한국미술사를 완성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대구 수창초등학교를 거쳐 서울 휘문고보에 진학한 그는 32년 조선미술전람회에 고보재학생으로 입선해 천부적인 재능이 있음을 보여줬다. 도쿄제국미술학교로 진학해 재학시절 이과전(일본화단에서 제도적 관심을 거부한 진취적 의식의 미술가들이 주로 참여한 대표적 재야단체)에 출품해 연 3회 입선했다. 41년 도쿄에서 이중섭 등과 신미술가협회를 조직하고, 45년 광복 직후에는 조선조형예술동맹 및 좌익의 조선미술동맹 간부가 되었다가 스스로 이탈했다. 47년에는 조선미술문화협회 창립을 주도했다. 49년에 열린 제1회 국전에서 서양화부 추천 작가로 참가하기도 했다.

대구미술관은 “이쾌대는 일제강점기 암울하고 억압받는 시대를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등 작가의 민족의식이 내포된 작품을 보여줬다는 데서 남다른 의미를 가진다. 인물을 일관된 주제로 작업한 30~40년대 최고의 인물화가이기도 했다”고 평가했다.

김수영기자 sykim@yeongnam.com

▨도움말= 대구미술관, 대구시 문화예술과, 대구시 발간의 ‘대구의 문화인물’, 대구시편찬위원회 발간의 ‘대구시사(大邱市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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