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가의 술과 음식 이야기 .5] 함양 일두가문 ‘솔송주’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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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8-21   |  발행일 2014-08-21 제18면   |  수정 2014-10-17
변함없이 푸른 지리산 솔잎처럼, 500년 이어온 전통주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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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선씨가 소나무 햇순과 잎으로 솔송주 덧술을 담그고 있는 모습. <명가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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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송주를 빚어온 눌제고택 안채. 눌제 정재범은 일두 정여창의 13대손이다.


16대째 이어온 가양주
현재까지 정여창 제주로 쓰여

 

1996년 명가원 설립 대중화 힘써
남북정상회담 만찬주 선정되기도
2012년 경남 무형문화재 지정


조선시대 선비 사회에서 ‘좌 안동, 우 함양’으로 불리던 지역인 함양. 함양을 이처럼 선비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지게 한 주인공이 바로 일두 정여창(1450~1504)이다. 정여창은 동방오현(東方五賢· 한훤당 김굉필,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 일두 정여창, 퇴계 이황)의 한 사람으로 성리학의 대가다. 정여창의 고향이 함양의 개평마을(함양군 지곡면)이고, 이 개평마을 덕분에 함양이 선비의 고장으로 유명하게 된 것이다.

정여창 후손들이 500여년 동안 살아온 개평마을은 지금도 고택 한옥들이 즐비한 대표적 전통마을이다. 이 마을에 정여창 생존 때부터 담가 먹기 시작했을 것이라는 가양주가 지금도 전해오고 있다. 소나무 순인 송순과 솔잎을 넣어 빚는 솔송주다. 정여창의 16대손 정천상·박흥선 부부가 빚고 있다. 일두 가문에서 옛날부터 부르던 이름은 ‘송순주’였는데, 이들 부부가 대량 생산을 위해 1996년 주조 허가를 받을 때 ‘송순주’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없어 새로 지은 이름이 ‘솔송주’다. 솔송주는 한 가문에 전해 내려오던 전통 가양주가 대중주로 발전한 대표적 사례다.

◆정여창 가문 가양주

일두 정여창 가문의 가양주 내력에 대해서는 정여창에게 조선 2대 왕인 정종의 손녀가 시집왔는데, 이 부인이 집을 찾는 손님들에게 내놓기 위해 솔순과 솔잎을 넣어 술을 빚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 술을 임금에게 진상하기도 했다고 한다. 대학자인 정여창의 집에는 수많은 손님이 드나들었고, 손님을 접대하기 위한 가양주를 빚는데 사용한 쌀이 한 해 300석에 달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 가양주는 일두 가문에서 대대로 전해내려 왔는데, 어느 때부턴가 종손 집안이 아니라 다른 후손 집안에서 그 가양주를 빚기 시작한 것 같다. 정여창의 13대손으로 제천 현감을 지낸 눌제(訥濟) 정재범 집안에서 그 가양주를 빚어왔고, 지금 그 가양주 전통을 잇고 있는 후손도 눌제의 증손자 부부다. 정여창의 16대손인 이들 정천상·박흥선 부부가 빚고 있는 솔송주는 지금도 정여창의 불천위 제사 때 제주(祭酒)로 오르고 있다. 박흥선씨(62)의 시어머니 때도 그랬다.

박흥선씨는 3년 전에 105세로 별세한 시어머니(이효의)로부터 술 빚는 법을 전수했다. 시어머니의 술 빚는 솜씨는 보기 드물게 뛰어났던 모양이다. 그 술을 맛보기 위해 개평마을의 눌제고택(일두고택 옆)을 찾는 이들이 많아 문전성시를 이룰 정도였다고 한다.

“제가 어릴 때 어머니가 담근 술을 맛보기 위해 우리 집을 찾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술 빚는 일을 좋아하셨는데, 정씨 집안에 시집와서 손님을 접대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술을 빚는 것을 삶의 중요한 부분이자 보람으로 여기셨던 것 같습니다.”

정천상씨의 말이다.

시어머니로부터 가양주 비법을 배운 박씨는 가양주를 대중화하기 위해 1996년 주조 허가를 받아 명가원(대표 정청산)을 설립, 솔송주를 생산·판매해오고 있다. 이때 타 지역에서 ‘송순주’라는 명칭을 먼저 등록한 사람이 있어 ‘솔송주’로 정했다.

현재 명가원에서 솔순과 솔잎을 사용하는 솔송주 외에 머루주, 복분자주, 녹파주 등을 함께 생산·판매하고 있다. 솔송주는 13도인 발효주 청주와 40도인 증류주 소주 두 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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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선씨가 빚어 판매하는 솔송주 제품.
◆솔순과 솔잎으로 빚는 솔송주

솔송주는 찹쌀로 죽을 만든 후 누룩을 잘 섞어 밑술을 담근다. 밑술은 사흘 정도 발효시킨다. 이 밑술이 잘 발효하느냐가 좋은 술을 만드는 관건이다. 이 밑술에 멥쌀로 고두밥을 쪄 식힌 후 솔순·솔잎과 함께 섞어 한 달 정도 숙성시킨다. 솔순과 솔잎은 살짝 쪄서 사용하는데, 떫은 맛을 없애기 위해서다.

숙성이 끝나면 채와 창호지로 걸러낸 다음, 다시 20일 정도 지난 후 맑은 윗술을 떠내면 지리산 솔송주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간다.

솔순과 솔잎은 매년 봄 4월 중순에서 5월초 사이에 문중 선산인 개평마을 주변 산에서 채취해 보관하면서 사용한다.

박씨는 시어머니가 집에서 조금씩 담그던 술을 더 많은 사람이 즐길 수 있도록 해보라는 주변의 권유에 따라 명가원을 설립해 대량생산하기 위한 사업을 시작했는데, 많은 시행착오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경험과 감으로 빚던 것을 대량 생산을 위한 제조법으로 체계화시키는 일이 쉬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함으로써 품질을 인정받으면서 많은 술 품평회에서 상을 받았고, 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2007년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북한 방문 당시 남북정상회담 때 남측이 내놓은 공식 만찬주로, 2008년에는 람사르 총회 때 공식 건배주로 선정되기도 했다.

박씨는 솔송주로 농식품부의 한국전통식품명인 제27호(2005년)로 지정받고, 또한 2012년에는 솔송주가 전통주로 그 역사성과 보존가치를 인정받아 경남도 무형문화재 제35호(함양 송순주)로 지정됐다.

정작 박씨 자신은 술을 전혀 못하는 사람이지만, 남다른 미감으로 가문 대대로 전해 내려온 가양주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지리산 자락의 좋은 물과 함양의 좋은 토양에서 자라는 소나무 순과 잎을 사용해 일두 가문 며느리들이 정성을 다해 빚어온 솔송주는 박흥선 명인을 이어 그 딸이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한편 눌제고택에 딸린 솔송주 문화관에는 술 빚는데 사용하던 전통 도구들이 다양한 솔송주 제품과 함께 전시되고 있다.

◆정여창과 술

일두 정여창은 조선 성리학의 종(宗)으로 숭상되는 인물로, 가장 친한 친구인 한훤당 김굉필과 함께 점필재 김종직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곧고 강직한 성품의 그는 연산군의 세자 시절 스승이기도 했다.

하지만 무오사화에 연루돼 김종직의 문인이라는 이유로 함경도 종성에 유배되고, 1504년 결국 유배지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54세였다. 그 후 갑자사화(1504)가 일어나 김굉필이 사사될 때 부관참시(剖棺斬屍)되는 운명을 겪는다.

중종반정으로 복관돼 정몽주·김굉필과 함께 조선 도학(道學)의 종으로 숭상되면서 1517년 우의정에 추증되고, 1568년에는 시호 문헌(文獻)이 내려졌다. 이후 1610년 동방5현으로 문묘(文廟)에 모셔졌다.

그의 강직한 품성을 알게하는, 술과 관련된 일화가 ‘선유록(儒先錄)’에 전한다.

“선생이 중년에 소주(燒酒)를 마시고 취해 광야에 쓰러져서 하룻밤을 지내고 돌아오니, 어머니가 매우 걱정이 되어 굶고 있었다. 이때부터 음복 이외에는 절대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성종 임금이 그에게 술을 내린 적이 있었다. 그때 선생이 땅에 엎드려 이르기를 ‘신의 어머니가 살았을 때 술 마시는 것을 꾸짖으셨는데, 그때 신은 술을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고 굳게 맹세하였사오니 감히 어명을 따르지 못하겠습니다’고 했다. 임금이 감탄하며 이를 허락했다.

선생이 일찍이 태학에서 공부하다가 어머니를 뵈러 집에 갔더니, 집안에 전염병이 돌았다. 선생이 들어가서 어머니를 뵌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가 이질을 얻어 매우 위독하게 되었다. 선생이 향을 태우고 기도하였으나 효험을 보지 못하자 이윽고 똥을 맛보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소리쳐 울면서 피를 토했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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