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시론] 대심문관들의 우화

  • 인터넷뉴스팀
  • |
  • 입력 2018-06-27   |  발행일 2018-06-27 제31면   |  수정 2018-06-27
[영남시론] 대심문관들의 우화
김진국 신경과 전문의

햇살이 제법 따가운 길을 타박타박 걸어가던 교복 차림의 소녀가 대심판정이 바라보이는 길로 들어서자 13인의 심문관이 병풍처럼 늘어서서 길을 막았다. 그들 중 좌장으로 보이는 노심문관이 한가운데서 걸어 나와 소녀 앞으로 다가섰다. 근엄한 심문관의 복장 대신 평상복을 입은 노인의 표정에서 인자한 구석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대신 강퍅한 눈빛과 함께 쇳소리같이 날카로운 음색의 말을 겁먹은 소녀에게 토해냈다.

“가라! 여긴 어린 네가 올 곳이 아니다. 이 지상의 모든 광휘와 영광과 풍요로움은 ‘기적’과 ‘신비’의 힘으로 이룬 것이고, 여기는 그 힘을 온전히 지켜냄으로써 그 누구도 훼손하거나 감히 도전할 수 없는 권위를 얻은 곳이니라. 이 지상의 질서와 안녕을 방해하지 말고 돌아가거라. 여긴 어린 너의 호기심이나 충족시켜줄 정도의 한가로운 곳이 아니니라.”

겁먹은 표정으로 침을 꼴깍 삼킨 소녀는 또박또박 말을 이어나갔다. “그 기적이란 것이 혹시 ‘한강의 기적’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건 한강 다리가 끊어지고 백화점 하나가 홀연히 사라지면서 물거품으로 변한 것 아닌가요. 그나마 그 기적이란 것도 깡마른 빵 조각 하나를 던져주고서는 권력의 발밑에 머리를 조아리고 자유를 헌납하도록 강요하여 얻은 결과지요. 빵 대신 자유를 갈구한 사람들은 할아버지 같은 사람들이 두들긴 법봉에 목숨까지 잃어야 했고요. 권력과 거래에 의한 ‘사법살인’이라 들었습니다. ‘신비’는 또 어떤가요? 정말 ‘백두혈통’의 신비만큼이나 낯간지러운 이야기였지요. ‘형광등 백 개를 켜놓은 듯한 아우라’는 누가 만든 신비였나요? 엄청난 협잡과 부정이 끼어든 선거를 합법적 선거로 둔갑시켜버린 신비스러운 재주는요? 이제 서로 의지하며 밀고 당겨줄 거래의 상대가 사라졌지만…. 그래도 돌을 황금으로 변하게 하는 기적을 일으키는 신비로운 힘은 할아버지같이 온몸을 권위로 칠갑을 한 전관들이 독차지하고 있는 힘 아닌가요.”

노인의 눈가에 파르르 경련이 일어났고, 파리해진 입술 사이로 격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재판은 법리에 대한 숙고와 심문관의 양심에 따른 고뇌의 결정이지 거래라거나 전관예우라는 말이 있을 수가 없다. 무지하고도 당돌하고 참 발칙하구나! 어린 것이. 그 입 다물라!”

소녀는 답했다. “조시마 장로의 전설 아시나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죠. 장로의 내공과 권위는 성인의 반열에 오를 정도였는데, 죽은 뒤 시체 썩는 냄새가 보통 사람보다 더 지독했다네요. 성인은 죽어도 시체 썩는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데…. 그게요, 장로의 암자에는 수도원을 찾아온 귀부인들이 대기하는 내실과 연결되는 개구멍이 있었기 때문이래요. 그 개구멍으로 조시마 장로는 아무도 몰래 귀부인들의 내실을 부지런히 드나든 것이지요.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요? 우리나라도 ‘유전무죄’ ‘유권무죄’가 불문율인 걸 보면 대심문관들의 집무실에는 갑부들이나 고관들의 내실과 연결되는 개구멍이 있을 것 같아요. 그렇다고 저 같은 하찮은 것이 촛불을 들고 찾아낼 수는 없잖아요. 카프카(소송)가 그랬어요. 말단 문지기가 입고 있는 외투에 붙어있는 벼룩에게 간청이나 해볼 수 있을 뿐, 시민은 절대 법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드디어 눈에 살기가 번득이는 노심문관이 피를 토하듯 소리를 지른다. “대심문관들의 판단에는 오류가 있을 수 없다. 심문관의 권위가 무너지고 법적 안정성이 훼손되면 이 나라의 모든 질서와 안녕이 무너진다.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믿어라. 의심하지 말라! 오류가 있어도 트집 잡지 마라! 심판정의 권위에 불경을 저지르는 일이다!” 이때 뒤편에 서 있던 심문관들도 서로 어깨를 걸고서 합창을 하듯 소리를 지른다. “개구멍이 있다는 의혹에 근거가 없다!”

소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개구멍이 있다는 의혹에 근거가 없다’는 말과 ‘개구멍이 없다’는 말은 동의어가 아닌데…. 저 ‘아재’들은 ‘고딩’보다 문장력과 문해력이 떨어지네. 어떻게 저 자리에 올랐을까.”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오피니언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