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시론] 문명사회와 원한의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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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0-24   |  발행일 2018-10-24 제31면   |  수정 2018-10-24
[영남시론] 문명사회와 원한의 인간

라스콜리니코프는 평생 지독한 간질병에 시달린 도스토옙스키의 창작혼이 낳은 소설 ‘죄와 벌’ 속 가공인물로, 니체가 말한 전형적인 원한(Ressentiment)의 인간이다. 이 원한의 인간들은 ‘시선을 자기 자신에게 되돌리는 대신 반드시 밖을 향하는’ 특징들이 있는 한편 자신보다 약한 상대들 중에서 복수를 위한 먹잇감을 찾는 비굴한 경향이 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19세기 러시아 문명을 대표하는 수도 페테르부르크의 뒷골목에 있는 바람 한 점 통하지 않는 ‘관 속’ 같은 골방에 처박혀서 먹을 게 있으면 먹고 없으면 굶은 채로 그저 ‘생각하는 일’만 하는 대학 휴학생이다. 그리고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이를 갈고, 길 가다 마주치는 모든 사람에게 침을 뱉고 물어 뜯어버리고 싶을 정도의 증오심을 품고 산다. 그의 병적 증오심은 끝내 과대망상으로 비약돼 스스로를 비범인이라 자처하며 복수를 감행한다.

그런데 그가 복수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부조리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거대 권력이나 거악이 아니었다. 병약한 전당포 노파와 장애가 있는 여자로, 사회적 약자를 겨냥한 전형적인 혐오범죄였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의 범죄적 상상력은 계획범죄를 저지르고 완전범죄까지 기획한 지능범이면서 저항능력이 없는 두 여성을 한꺼번에 도끼로 내리쳐 죽인 흉악범죄자를 간질병과 우울증에 광장공포증이 있는 심신미약자로 만들어버린다. 그래서 라스콜리니코프는 심신미약 상태에서 저지른 범죄라는 점과 자수했다는 사정이 참작이 돼 8년의 유형생활이라는 관대한 처벌을 받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반성한 것도 아니다. 가난한 법대 휴학생의 지적 오만과 피해망상증이 키운 증오심은 전당포 노파를 살 가치가 없고 이처럼 짓이겨 없애야 할 혐오스러운 존재로 규정하며 끝까지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한다.

카뮈의 소설 ‘이방인’에 또 한 사람의 원한의 인간이 등장한다.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뫼르소는 먼 벽촌의 요양원에서 격리된 삶을 살던 어머니의 죽음을 전해 듣고 ‘귀찮은’ 마음으로 휴가를 낸다. 그리고 ‘범죄자의 마음으로 어머니를 땅에 묻은’ 뒤 장례도 마쳤으니 ‘일찍 잠자리에 들 수 있겠다’는 생각에 기뻐하는 인간이다. 그리고 아직 상복을 입은 처지임에도 방탕한 생활을 즐기다가 우연히 마주쳐 시비가 붙은 행인에게 총질을 한다. 이미 쓰러진 사람에게 장전된 총알을 모두 갈겨버릴 정도의 잔혹성까지 드러낸다. 이유는 단지 강렬한 햇볕 때문에 짜증이 났다는 게 전부다. 알제리 출신의 정신과 의사 프란츠 파농은 프랑스 백인들은 그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 사람들을 흑색 피부로 ‘봉인된 사물’에 불과한 존재로 취급했다고 비판한다. 그래서인가? 카뮈는 애초 이 사건은 경찰이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사건이었다고 했다. 사람이 아닌 사물을 하나 치운 사건에 불과했기에. 라스콜리니코프와 달리 뫼르소는 극형을 선고받지만 죄목은 살인죄가 아니라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패륜죄다. 판사의 이런 엽기적 판결에 뫼르소는 항소도 하지 않고 교수형을 수용한다. 재판정이 너무 더웠고, 그 와중에 코끝으로 날아드는 파리가 귀찮았고, 사는 게 의미가 없어서.

21세기의 한국사회 곳곳에 원한의 인간들이 숨어 있다. 골방에서 이를 갈며 원한을 속으로 꾹꾹 씹어 삼킨 이들이 언제 심신미약 상태가 되어 여성, 장애자, 알바생, 노약자, 이주민, 성소수자, 난민들을 대상으로 복수를 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이들을 광장으로 끌어내지 않는 이상 PC방 알바생이나 강남역 여성과 같은 무참한 죽음은 계속될 것이다. 부정과 부패, 부조리가 쌓이는 만큼 한쪽에는 원한이 쌓이고, 그 원한이 쌓이는 만큼 복수도 늘어나는 것은 문명사회의 공통된 현상인 것 같다. 그 복수는 항상 약자를 겨눈다. 세계보건기구는 우울증을 21세기 인류를 위협할 위험한 질병 중의 하나로 꼽고 있다. 2015년 기준 전 세계에서 3억명이 넘는 사람이 우울증을 앓고 있다. 서울 강서구 PC방 알바생의 명복을 빈다.

김진국 (신경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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