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태의 제3의 눈] 징병제 폐지, 세계적 흐름이다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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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1-22   |  발행일 2019-11-22 제22면   |  수정 2020-09-08
징병 폐지는 시민사회 염원
美 등 109개국 모병제 실시
최근 우리나라·태국도 논란
남북문제를 핑계 삼지 말고
기성세대 발상의 대전환을
[정문태의 제3의 눈] 징병제 폐지, 세계적 흐름이다
국제분쟁 전문기자

지난 주 서울과 방콕에서는 약속이나 한 듯 징병제 폐지안이 튀어나왔다. 서울 쪽 민주당이 징병제 폐지론을 흘려 간을 보는 사이 방콕 쪽 퓨처포워드당(FFP)은 징병제 폐지 법안을 내놨다. 오랫동안 군대식 문화가 지배해온 두 사회에서 가장 예민한 사안이 동시에 얼굴을 내미는 흔치 않은 일이 벌어진 셈인데, 좋은 비교거리가 될 듯해서 오늘 화두로 삼았다.

태국은 1932년 유럽 유학파 관료와 군인들이 무혈 쿠데타로 절대왕정을 무너뜨리고 입헌군주제로 바꾼 뒤, 지난 87년 동안 성공한 쿠데타만 19번이었고 군인이 정치를 말아먹은 기간만도 57년이었다. 그 사이 총리 29명 가운데 16명이 군인이었다. 현 총리 쁘라윳 짠오차도 2014년 쿠데타로 권력을 훔친 뒤, 말썽 많았던 올해 총선을 통해 ‘합법’으로 둔갑한 경우다. 이판에서 징병제 폐지를 꺼낸다는 건 한마디로 간 큰 짓이라는 뜻이다.

‘징병제 폐지는 군 개혁 일환. 18~29세 남성 예비군으로 편성해 보완. 전쟁 위협 시 내각이 예비군 동원 명령. 자원병은 5년 복무에 5년 연장 가능, 시험 거쳐 중령까지 진급 가능. 자원병 인권보호 명문화, 장교의 자원병 사적(하인) 이용 금지.’

이게 퓨처포워드당이 밝힌 징병제 폐지 법안 줄거리다. 이 당 부대표 뽕사꼰 롯쫌푸 중장 말을 들어보자. “전문 훈련 없이 머릿수만 채우는 현 2년짜리 징병제로는 강한 군대 못 만든다. 게다가 부잣집 아이들은 고등학교 때 (국방의용군) 훈련 통해 다 빠져나가고, 그 기회마저 못 얻는 가난한 아이들이 징병 당해왔다.”

아니나 다를까 총리 쁘라윳은 퓨처포워드당이 징병제 폐지를 포함한 군 개혁안을 꺼내자마자 “왜 군대를 미워하나? 군대가 미운 자들은 나하고 국경(남부 무슬림 분리주의 분쟁지역)으로 가자”며 발칵했다. 곧장 야당에서는 “아무도 군대를 미워하지 않는다”며 발뺌했고.

태국 돌아가는 꼴이 오랫동안 우리가 겪어온 현실과 별로 다를 바 없다. 군 개혁과 시민중심사회로 이동이라는 징병제 폐지의 본질도 마찬가지고.

해마다 4월이면 태국 징병소는 제비뽑기로 슬픈 웃음거리를 남긴다. 검은 카드를 뽑은 젊은이들이 만세를 불러대는 곁에서 붉은 카드를 뽑은 이들이 기절하고 울고불고 난리를 피우며. 올해는 21세 징병 대상자 100만 가운데 제비뽑기와 자원자를 합쳐 10만을 신병으로 데려갔다. 타이 정부는 33만5천 병력의 군사비로 올해 국민총생산의 1.4%인 8조5천억원을 잡았고, 그 가운데 4천650억원을 사병 임금에 썼다. 근데 2015년부터 크게 늘어난 자원자가 올해는 신병의 40%를 메웠다. 이미 수십 년 동안 전쟁이 없었고 아세안(ASEAN)의 결속 강화로 주변국과 전쟁 가능성마저 희박해진 태국이고 보면 현실적으로 징병제 폐지의 바탕이 나온 셈이다.

태국 사회에서 징병제는 시한폭탄이었다. 그동안 사병들이 장교의 하인 노릇을 해온 노예적 군대문화는 끊임없이 말썽을 일으켰고, 학생과 빈곤층 젊은이들의 미래 준비 기회를 빼앗는다며 말들이 많았다. 결국 그 결과는 경쟁력을 키워야 하는 국가의 기회 상실로 이어졌다.

현재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109개 나라는 모병제, 프랑스와 태국 같은 11개 나라는 징병과 모병 혼용제, 멕시코와 베트남 같은 11개 나라는 선택적 징병제를 지녔다. 세계적 흐름이 모병제일 뿐 아니라, 징병제에도 여러 길이 있다는 뜻이다.

징병제 폐지는 세계시민사회의 염원이자 인류사적 의무인 ‘군비축소’ ‘반전평화’라는 대 전제 아래 다뤄야 할 사안이다. 남북문제를 핑계 삼아 군 개혁을 거부해온 기성세대가 발상의 대전환을 할 때가 됐다. 전쟁 방지와 평화 수호는 기성세대의 의무다. 전쟁을 빌미로 우리 아이들한테 징병의 짐을 지울 수 없는 까닭이다. 우리 아이들이 스스로 의지에 따라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줘야 한다. 이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 제도도 현실에 맞춰 고쳐나가면 된다. 겁낼 까닭도 없다. 우리한테는 건강한 시민사회가 있지 않던가.국제분쟁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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