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생매립장 들어선 400년 류씨마을…"안 보이면 잊기라도 할텐데"

  • 송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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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4-29   |  발행일 2020-04-29 제13면   |  수정 2020-04-29
달성군 방천리 문화류씨 집성촌
매립장 조성으로 주민들 이주
밤나무숲·참샘·돌담도 사라져
실향민 망향비 세워 그리움 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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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달성군 방천리 안마을 항공사진. <방천리 문화류씨 문중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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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방천리 대구위생매립장 원경. 송은석 시민기자 3169179@hanmail.net

"1989년부터 안마, 바깥마, 원마 세 마을이 차례대로 사라졌죠. 당산나무, 장수바위, 여호재, 척호정, 참샘, 상엿집, 마을 돌담도 다 사라졌죠. 제주도 돌담 못지않았는데…."

대구시 달성군 다사읍 방천리에는 대구에서 배출된 모든 생활쓰레기를 모아 소각, 매립하는 대구위생매립장이 있다. 1989년과 2005년 2차에 걸쳐 조성된 대구위생매립장은 면적이 105만3천㎡로 축구장 147개에 해당하는 규모다. 매립장이 방천리에 들어서게 된 것은 특이한 이곳 지형이 한몫했다. 동·서·남쪽은 'U' 자형 와룡산에 둘러싸여 있고, 북쪽은 금호강이 가로막고 있다.

매립장이 조성되기 전 방천리엔 안마을, 바깥마을, 원(院)마을 세 마을 100여 호의 민가가 있었다. 이 중 가장 안쪽에 자리한 안마을은 400년 내력 문화류씨 집성촌이었고, 바깥마을과 원마을에도 류씨, 강씨 등이 살았다.

문화류씨 방천리 문중 류성렬 회장(70)은 "1차 때는 아무런 대책 없이 살 곳을 찾아 뿔뿔이 고향을 떠났고, 2차 때는 그나마 와룡산 너머 이곡동으로 집단 이주를 했다. 지금도 와룡산에 오르면 옛 고향 땅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안 보이면 차라리 잊기라도 하겠는데…"라고 말했다.

가장 먼저 사라진 안마을은 방천리 세 마을 중 제일 큰 마을로 역사가 가장 오래된 마을이었다. 마을 앞 논은 비록 천수답에 면적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 일대에서는 금싸라기 같은 논이었다. 금호강에 제방이 없었을 때 성서를 비롯한 인근 마을은 비만 오면 농경지가 침수됐다. 하지만 방천리에는 그런 일이 없었다.

마을에는 마을 역사만큼이나 오랜 수령을 자랑하던 마을 수호신 당산나무가 있었고, 들판 가운데는 사시사철 맑은 물이 샘솟는 참샘이 있었다. 마을 뒤 산기슭에는 이 마을 류씨 문중 재실인 여호재와 정자 척호정이 있었고, 장정 십여 명이 둘러앉을 수 있는 크기의 거대한 장수바위도 있었다. 또 마을에는 제주도 돌담을 연상케 하는 마을 돌담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고, 여느 전통마을처럼 마을 초입에는 상엿집도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금호강 변 넓은 백사장과 밤나무 숲은 인근 학교 학생들의 단골 소풍지이자 대구시민의 휴양지였으며, 지금의 해랑교 자리에는 돌교각에 싸릿대를 얽고 흙을 덮은 도깨비다리도 있었다. 음력 정월대보름엔 와룡산 용두봉에 달불을 놓았는데, 인근 자연부락 중 가장 큰 달불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방천리의 이 모든 유적과 전통은 이제 다 사라지고 남은 것이 없다. 400년 내력의 유서 깊은 전통마을이 통째로 대구시민이 배출한 생활 쓰레기를 처리하는 매립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방천리 입구 한편에는 문화류씨 문중 재실인 여호재, 선영, 망향정, 망향비 등이 세워져 이들 방천리 실향민의 아픔과 그리움을 달래주고 있다.

류 회장은 "기억이 남아 있을 때 옛 고향의 모습을 스케치형식으로라도 정리해 후손들에게 남겨주고 싶다. 고향을 지키지 못했던 우리 세대가 후손을 위해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송은석 시민기자 316917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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