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김진수<대구 강서소방서 화재조사팀장> 119에도 양치기 소년이 나타났다

  • 이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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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7-23   |  발행일 2020-07-24 제21면   |  수정 2020-07-23
김진수

사람은 한 번만 살 수 있기에 일생(一生)이라 한다. 한 번밖에 못사는 삶을 어쩌다 소방관이 됐지만 한 번뿐인 삶을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직업'으로 살 수 있었고, 살고 있다. 생명을 구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일터에서 일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올해로 소방관 생활 24년차에 접어들었지만 아직도 "출동, 출동" 119종합상황실의 출동 사이렌이 울리면 초긴장으로 돌입하게 된다.


하지만 오인 출동으로 허탕을 칠 땐 허탈할 때도 많다. 예전에 비해 '거짓 119 신고'는 많이 줄었다. 사람에 의한 거짓 신고가 아니라 건물에 설치된 소방시설의 오작동에 의한 허위출동 때문에 애를 먹곤 한다.


아파트·학교·어린이집·병원·요양시설 등 큰 건물엔 자동화재 속보설비가 설치돼 있다. 이 설비는 화재 등 이상 신호를 감지하면 사람이 아닌 설비 자체에서 119종합상황실로 화재신고를 자동음성으로 하게 되는 장치다. 근무자가 실수로 작동을 잘못해서, 또는 먼지·담배 연기·습기·누수에 의해 오작동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출동 때부터 허위출동이란 것을 알 수 없기에 꼭 현장에 도착해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허위출동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일백 번 중 한 번이라도 실제 화재일 수가 있기에 소홀히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작년 늦가을에 있었던 일이다. 한 초등학교에서 3개월 간 일곱 번이나 상습적인 자동화재속보설비 오작동으로 소방차가 출동했던 적이 있다. 매번 허탕을 칠 때마다 학교 관계자는 죄송하다는 말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토요일 오후 그 학교에서 화재가 발생했다는 자동음성의 119신고가 들어오게 된다. 경비 아저씨가 면목이 없었던 지 제대로 확인해보지도 않고 또 오작동으로 속단하고 119상황실에 출동을 안해도 된다고 도로 연락이 왔다. 그리곤 설비가 더이상 작동 못하도록 스위치를 일시 정지시켜 버렸다. 그런지 10분 쯤 지나 재차 신고가 들어왔다. 이젠 실제 화제가 났다는 것이다. 신속히 출동해 도착해보니 교실 한 칸에서 연기가 마구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사고의 전말은 이러하다. 당일 오전 10시30분~ 낮 12시55분 과학실에서 학생 20명이 선생님 지도 아래 과학수업을 했다. 산화반응을 일으키는 루미놀 혈액반응 실험을 한 뒤 뒷정리를 하면서 혈액 채취 때 사용한 알콜솜과 아연 가루 등 실험 찌꺼기들을 종이에 말아 쓰레기통에 버린 뒤 하교했다는 것. 쓰레기통엔 물기도 섞여 있었는데 아연가루가 화학적 반응을 일으켜 열이 발생해 자연발화하면서 화재가 발생한 것이었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교실 한 칸을 다 태우고 말았다. 119에도 '양치기 소년'이 나타난 격이었다. 그날 수업을 하고 뒷정리를 경솔히 했던 선생님과 학생들, 화재경보음이 울렸음에도 거짓일 것이라는 생각에 119출동을 늦추었던 경비아저씨, 모두들 어쩔 줄 몰라 했다. 참으로 난감해하던 그 표정들이 오래도록 기억난다. 


작년 가을부터 지금까지 전국 초등학교에 학교안전강사로 선정돼 비번날 안전교육을 다니고 있다. 그 때마다 그 황당했던 과학실 화재사례 통해 배운 교훈을 교육생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3교대 근무자로서 비번날을 활용해 전국 학교를 누비며 재난안전·생활안전·응급처치법 등 각종 안전에 대해 교육한다는 것이 이젠 크나큰 보람이고 행복감으로 다가온다.


올핸 코로나19와 치열한 싸움을 벌여왔다. 선전한 덕분에 승리를 곧 앞두고 있다. 그러나 방심은 금물이라 했던 가. 재난은 마치 코로나19처럼 잠시 방심하는 틈에 조용한 전파자로 다가오고 있지 않을까. 설령, 119와 삶의 현장에서 '양치기 소년'이 나타나 여러 번 허탕을 치는 출동이 있을지언정 아무 탈이 없기만 한다면 참 감사하겠다는 아이러니한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김진수<대구 강서소방서 화재조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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