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이정웅 (전 팔거역사문화연구회장)...대구와 칠곡군

  • 박진관
  • |
  • 입력 2020-08-23   |  발행일 2020-08-24 제25면   |  수정 2020-08-23
이정웅
이정웅 (전 팔거역사문화연구회장)

대구·경북의 미래가 걸린 통합 신공항건설이 군위와 의성군에 확정되면서 그 전제 조건 중 하나로 군위군이 대구에 편입될 예정이다. 관문 공항을 가질 수 있는 대구로서도 좋은 일이고, 군위군민도 찬성하고 있다. 아울러 대구시 일부 의원들이 칠곡군도 편입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피력했다는 보도(영남일보 2020년 8월6일자 사설)가 있었다. 필자 역시 동의하며 칠곡군의 뿌리가 본디 대구였다는 사실을 살펴보며 편입을 주장하거나 혹은 반대하는 사람들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칠곡(오늘날 대구 북구 관음동을 비롯한 강북지역 8개 동 포함)은 삼국시대 팔거리현으로 북치장리(北恥長里), 또는 인리(仁里)였다. 이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757년(경덕왕 16) 군현제도(郡縣制度)를 도입하면서 오늘날 대구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수창군(壽昌郡·고려 초 수성군으로 개명) 4개 속현의 한 현(縣)으로 대구현, 화원현, 하빈현과 더불어 팔리현(八里縣)으로 대구에 편입됐다. 


이후 261년 동안 대구의 속현으로 유지돼 왔었으니 올해로 1천273년 전의 일이다. 고려에 들어와 1018년 (현종 9) 성주목(현 성주)의 속현으로 바뀌면서 팔거현(八居縣)이 되었다가 어느 때 '있을 거(居)'자가 '감자 거(초두 밑에 음률러)'자의 팔거현(縣)으로 불렀다. 


이 때 팔거현은 오늘날 칠곡군의 왜관읍·지천면·동명면과 대구시 북구의 관문동, 태전1· 2동, 구암동, 관음동, 읍내동, 동천동, 국우동이 이에 해당한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조선이 위기에 처하자 명나라 지원군의 유정(劉綎) 부대가 팔거에 주둔하고 이를 지원하기 위해 경상감영이 설치됐으며 이후엔 가산(架山)이 관방(關防)으로서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1640년(인조 18)엔 622년간의 성주 속현 시대를 마감하고 칠곡도호부로 승격해 부사(府使)가 고을을 다스리고 관아는 가산산성 안에 두었다. 


그러나 험준한 산길로 오르내리기가 불편해 1819년(순조 19) 현 대구시 북구 읍내동 일대로 치소를 옮겼다. 갑오경장과 더불어 지방행정 제도가 변경되면서 1895년(고종 32) 도호부가 폐지되고 군(郡) 제도가 도입돼 칠곡군은 다시 대구에 편입됐다가 이듬해 1896년(고종 33) 경상북도로 바뀌어 지내오고 있다가 1981년 칠곡읍만 대구직할시(현 대구광역시)에 편입돼 오늘에 이른다. 즉 1천300여 년 전 신라시대와 조선 후기 한 때 칠곡은 대구였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군청을 읍내동에서 왜관으로 옮겼다. 그러나 칠곡향교·칠곡초등·칠곡중·칠곡농협·칠곡 3지구·칠곡 경대병원 등은 대구시 북구에 있으면서도 칠곡이라는 지명을 그대로 쓰고 있으며, 중앙고속도로 칠곡나들목의 경우 북구 관음동에 있음에도 칠곡군에 있는 것으로 오해한 외지사람들이 혼란을 겪고 있다고 한다. 이런 불합리한 현상은 군민의 경제생활, 지역의 정체성, 향토문화의 계승, 대중 교통이용에서도 일어난다. 따라서 대구로의 편입 문제가 일찍부터 있어왔다. 조선 후기에도 대구로 편입시키려고 했으나 매원 출신의 낙촌(洛村) 이도장(1603~1644)의 상소로 무산된 일이 있었다.


칠곡군의 대구편입 문제는 지방자치법, 선거구 획정, 상급기관인 도(道)의 입장 등 외부적 제약 요인도 만만치 아니하고 주민들 역시 찬반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대구시와의 상생, 통합 신공항건설이 미래 칠곡에 미칠 효과, 주민의 편익 등을 검토해 긍정적으로 결정했으면 한다. 수창군의 속현으로 여초(麗初) 성주목에 이속(移屬)됐던 화원, 하빈현은 대구로 다시 복귀했으나 팔거현은 일부만 돌아왔다.
이정웅<전 팔거역사문화연구회장>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오피니언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