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과 한국문학] 가투놀이에 관한 추억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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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9-10   |  발행일 2020-09-10 제26면   |  수정 2020-09-10
화투 모르는 이가 없겠지만
가투는 아는사람 거의 없어
시조 내용 맞추는 가투놀이
재미와 공부 일석이조 효과
일제시대 시조 부흥 견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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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락 경북대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3남매가 어떤 놀이에 몰입해 있다. 형은 붉은색 카드를 쥐고 "태산이"라고 외쳤다. 이에 나와 여동생은 바닥에 흩어져 있는 푸른색 카드 가운데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라고 적힌 카드를 서로 빨리 찾기 위해 다투었다. 빨리 찾게 하기 위하여 "사람이"라는 부분은 큰 글씨로 써 두었다. 내가 그 카드를 먼저 찾으면 동생이 다음번엔 반드시 먼저 찾겠다며 별렀고, 동생이 먼저 찾으면 나 또한 그러하였다.

그런데 이번엔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형이 "청춘소년들아"라고 외쳤기 때문이다. 처음 들어 보는 것이었다. 눈이 휘둥그레져서 서로를 보고 있으니 형이 "백발노인 웃지 마라"라고 하였다. 그래도 알지 못하자 "공변된 하늘 아래 넌들 얼마 젊었으리"라고 했다. 이 역시 생소한 구절이었다. 이에 형은 마지막까지 다 읽어 주었다. "우리도 소년행락이 어제런듯 하여라." 그제야 우리는 마지막 구절이 적힌 카드를 먼저 찾기 위해 아우성을 쳤다.

어린 시절 우리 3남매가 벌인 가투(歌鬪)놀이의 한 장면이다. 이 가투는 집에 전해져 오던 것이었는데, 아마도 아버지께서 갖고 노시던 것이 아니었나 한다. 놀이 방법은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던 아버지로부터 배웠다. 가투의 붉은색 카드에는 초·중·종장이 모두 적혀 있고, 푸른색 카드에는 종장만 적혀 있었다. 종장의 첫 구는 조금 큰 글씨로 쓰여 있어 쉽게 볼 수 있도록 했다. 시조 100수가 이러한 형태로 되어 있는데, 종장을 많이 모으면 이기는 게임이다.

화투(花鬪)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터인데, 가투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가투의 기원은 일본 메이지 시대 이래 정월 민속으로 전래한 가투놀이인 듯하나, 조선시대부터 있어 왔던 시패(詩牌) 놀이와도 일정하게 맥이 닿는다. 시패놀이는 한자를 한 글자씩 써넣은 패쪽을 하나씩 집고 내놓으며 먼저 시구 한 줄을 맞추는 게임인데, 주로 남성 지식인이 그 놀이를 즐겼다.

시패놀이가 남성 중심의 놀이였다면, 가투놀이는 1920년대 초부터 1940년대까지 유행했던 여성 중심의 놀이였다. 가투놀이는 이후 시조놀이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시조 시인 이은상이 시조 100수를 선정하고, 화가 최영수가 거기에 삽화를 그려 넣어 가투를 새롭게 하기도 했다. 이어 동아일보에서는 1936년에 제1회 '부인 가투의 밤'이라는 행사를 개최했다. 이 대회는 1940년까지 진행되었으니 4회에 걸쳐 이루어진 것이다.

남성 지식인 중심의 시패놀이가 전통적으로 있어 왔지만 여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없었던 여성들을 위하여 일본의 가투놀이를 수입해 자국화한 것이 우리의 가투놀이다. 일제 치하의 민족 담론 속에서 당시 문단에서는 시조가 부각되었고, 국민문학파의 시조부흥운동 역시 이러한 분위기 가운데 전개되었다. 1922년 불선사본 '가투', 1927년 신민사본 '정선 화가투', 1935년 한성도서본 '시조노리'의 제작은 바로 이 같은 추세를 반영한 것이다. 나의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면 놀이가 공부이고 공부가 놀이인 때가 있었다. 가투놀이가 바로 그것이다. 조부로부터 회초리를 맞아 가면서 배운 한문과는 달리 우리 3남매가 둘러앉아 벌였던 심각한 가투놀이는 참으로 흥미진진한 것이었다. 그 게임에서 이기기 위하여 나는 형과 동생이 없는 틈을 타서 몰래 가투에 접근해 시조를 외우기도 했다. 내 책상 위에는 어릴 때 갖고 놀던 가투가 지금도 놓여 있다. 어쩌면 이 가투 덕분에 내가 현재 국어국문학과에서 고전문학 교수 노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정우락 경북대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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