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규완 칼럼] '이건희 미술관 실종 사건'-지방은 없다

  • 박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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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7-15   |  발행일 2021-07-15 제22면   |  수정 2021-07-15 07:29
서울 입지 결정, 문체부 독단
지자체 응모 기회마저 박탈
형식적 위원회 꾸려 눈속임
문화시설 집적효과가 웬 말
文 "연방제 수준 분권" 머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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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영화 제목=이건희 미술관 실종 사건, 제작사 오너=문재인, 감독=황희, 각본=황희, 투자자=삼성. 지방민 시각에서 문체부의 이건희 미술관 입지 결정을 영화 제작에 빗대 봤다. 결론적으로 이건희 미술관 서울 낙점은 총책 황희 문체부 장관의 시나리오와 거의 오차가 없었다. 용산이 선택지로 추가된 것 말고는.

문재인 대통령이 이건희 미술관 건립을 검토하라고 지시한 건 지난 4월 말이다. 이후 황희 장관은 국민 접근성을 내세워 이건희 미술관의 수도권 건립을 시사했다. 문체부가 서울 송현동 부지의 사용 가능성을 서울시에 타진한 것도 그즈음이다. 황 장관은 지자체의 유치 과열 경쟁은 엄청난 국고 낭비로 이어진다는 궤변까지 늘어놨다. 국고 낭비? 대구시가 미술관 건립비를 포함해 2천500억원을 시비로 투자하겠다는 제안을 뿌리치고 국가예산으로 서울에 미술관을 짓겠다는 게 오히려 국고 낭비 아닌가.

이건희 미술관 입지 결정은 과정도 결론도 다 불공정했다. 유신 독재시대로 회귀라도 한 걸까. 유치를 원하는 지자체엔 응모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문체부의 독단과 일방적 통보, 그게 다였다. 문체부는 '국가 기증 이건희 소장품 활용위원회'란 걸 꾸렸다. 한데 위원회 구성과 논의 과정을 공개하지 않았고, 위원은 1명 빼곤 모두 수도권 인사였다. 형해화(形骸化)된 위원회로 체면치레만 하려는 암수(暗數)였다.

입지 서울 결정 이유도 가관이다. 소장품의 연구·관리 효율성과 인접한 국립현대미술관, 국립중앙박물관 등과의 시너지 효과를 감안했다는 것이다. 연구·관리의 효율성? 시너지 효과? 그럼 인구 35만명의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은 집적효과가 없어서 어떡하나.

집적효과는 경제 주체나 연관 산업을 한곳에 모음으로써 발생하는 시너지 효과다. 비용은 절감되고 생산효율은 높아진다. 스탠퍼드대와 UC버클리를 토양 삼아 탄생한 실리콘 밸리의 성공도 집적효과의 개가였다. 하지만 집적효과는 제조업과 벤처기업에 유효하다. 문화시설의 집적효과는 약육강식의 신자유주의 논리다. 문화향유의 부익부 빈익빈을 부추길 뿐이다. 정작 집적효과가 중요한 다목적 방사광가속기는 포항 아닌 청주에 주더니만 이건희 미술관은 집적효과를 따지겠다고?

황희 장관은 박재호 민주당 부산시당위원장과의 통화에서 "이건희 유족의 뜻을 상당 부분 반영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유족의 뜻을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아무려면 유족이 딱 부러지게 서울로 한정해 선을 그었을까. 사실이라면 대구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이건희 미술관은 '국립'이다. 유족의 뜻이 어떻든 공모 절차를 거쳐 투명하게 결정돼야 마땅하다. 황희 장관이 이건희 미술관 입지 발표 이틀 전 대구에 온 것도 불가사의하다. '어르고 엿 먹이기' 퍼포먼스였나.

문 대통령은 2017년 대선 후보 시절 "연방제 수준의 강력한 분권국가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연방제 수준? 연방제 국가 스위스는 10대 기업 중 8개사의 본사 소재지가 지방이다. 우린 100대 기업의 88%가 본사를 수도권에 두고 있다. 이건희 미술관 하나 지방에 보내지 못하면서 연방제 타령이라니.

하기야 대한민국에 지방이 있기는 한가. 지방엔 재정자주권이 없다. 자치입법권이 없다. 지방엔 'SKY대학'이 없다. 관문공항이 없다. GTX도 없다. 지방엔 국립현대미술관이 없다. 이건희 미술관도 없다. '빌바오 효과'도 사라졌다. 고로 지방은 없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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