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보는 대구문화 아카이브 (25) 백기만] 이상화·현진건 등 교유…대구 최초 동인지 발간

  • 최미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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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12-20   |  발행일 2021-12-20 제20면   |  수정 2021-12-20 08:34
백기만개벽·여명·신민·조선일보 등 매체에 詩 24편 발표…광복 후에는 언론인·정치가로 활약
향토문화 발전 위해 경북문학협회 창립 후 협회 기관지 '문학계' 창간하기도
목우 백기만(1902~1969)은 일제강점기와 광복, 1950년대를 걸쳐 활동해온 시인이면서 문화활동가였다. 그는 폭넓게 활동했지만 이상화, 현진건 등 비슷한 시기 활동한 문인들에 비해 저평가됐다. 그는 직접 쓴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지만, 향토 문화 발전에 주로 열정을 쏟아부었다. 백기만은 1902년 대구 남산동 284에서 태어나 1912년 대구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17년 대구고보(현 경북고)에 들어갔다. 대구고보 재학 중 그는 이상화, 현진건, 이상백 등과 교유하면서 대구 최초의 동인 작품집 '거화'를 냈다. 거화는 백기만과 이상화의 문예활동의 시작점이면서 추후 대구 3·8독립만세운동을 하게 되는 데도 영향을 미친다. 거화는 현재 그 실물이 남아있지는 않는다.


백기만
◆'거화' '금성' 등 동인지 발간

1919년 백기만은 대구 3·8독립만세운동의 주모자 중 하나로 일제에 의해 검거돼 징역 1년을 선고받았으나 학생이라는 이유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이듬해 백기만은 이상화의 사촌형이자 대구 부호인 이상악 등의 학비 지원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 영문과에 입학했다. 백기만은 이후 함께 '금성'을 발간하게 되는 양주동(당시 와세다대 예과 재학)을 이곳에서 만난다. 백기만은 1923년 3월 '개벽'지에 '가엾은 청춘' '예술' '고별' 등 3편을 발표하는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시인으로 활동한다. 같은 해 11월 그는 양주동 등 와세다대 한국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금성'을 발간한다.

학비를 조달하는 게 어려워지자 백기만은 서울로 돌아와 소설가 현진건의 사랑채에 주로 지낸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그는 1924년 5월 고월 이장희를 '금성' 동인으로 추천했다. 이장희는 그때 나온 '금성' 3호에 '봄은 고양이로다'외 4편의 시를 발표했다. 백기만은 황석우와는 '조선시인회'이사가 되어 1926년 한국 최초의 '조선시인선집'을 발간했다. '조선시인선집'에는 1919년 이래 등장한 28명의 시인들이 포함되는데, 주요 시인은 이광수, 주요한, 이상화, 이장희, 김억, 김동환, 이은상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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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만이 황석우와 조선시인회 이사가 돼 한국 최초로 발간한 '조선시인선집'(왼쪽부터)과 이상화 시 16편·이장희 시 11편을 담은 '상화와 고월', 경북작고예술가평전인 '씨뿌린 사람들'.
◆향토 문화 운동 헌신

시인으로서 백기만의 활동은 1920년대 초부터 1930년대까지에 집중된다. 23년부터 28년까지 '개벽' '여명' '신민' '조선일보' '동아일보' '현대평론' '불교' 등의 매체에 24편의 시를 발표했다.

29년 10월 서동진, 오상순 등과 함께 조양회관에서 고월 이장희 유작 전시회를 연 이후 그는 시인으로서의 활동은 더 하지 않았다. 이후 1933년 4월 상주에서 탄광일을 보다가 북만주 빈강성(현 하얼빈)으로 가 농장에서 머물다 1945년 광복 한 달을 앞두고 귀국한다. 광복 후 그는 언론인, 정치가로 활동하게 된다. 반민특위 조사위원으로 활동하고, 46년 대구시보 주필을 맡았다. 53년 대구일보 상무이사, 57년 영남일보 논설위원 등 언론인으로 활약하면서 이 시기 '대구 시민의 노래'를 작사하기도 했다.

백기만은 1950년대 출판매체를 통해 향토 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힘썼다. 이상화의 형인 이상정 장군의 일대기를 담은 유고집인 '중국유기'(1950)를 편찬하고, 이 책에서 '곡조 이상정 장군'을 발표했다. 51년에는 이상화의 시 16편, 이장희의 시 11편을 담은 '상화와 고월'(청구출판사)을 발간했다. 여기에는 이들의 시뿐만 아니라 생애, 문학사적 의의도 함께 실어 이상화와 이장희 연구의 기반을 마련했다. 59년에는 경북작고예술가평전인 '씨뿌린 사람들'(사조사)을 편찬했다. 이 책에는 현진건, 이상화, 이장희, 이육사, 오일도, 백신애, 박태원, 김유영, 이인성, 김용조 등 시인·소설가·화가·음악가·영화감독 등의 작품과 평전을 실었다. 백기만이 직접 후기를 썼는데, 여기에는 그의 향토 문화에 대한 애정이 강하게 드러난다.

그는 향토 문학 발전을 위해 문학 단체도 만든다. 57년 경북문학협회를 창립하고, 위원장으로 추대된다. 창립총회는 당시 북성로 1가 35에 있던 영남여자고등기술학교 강당에서 열렸는데, 영남기술학교를 운영하던 이범륜·최옥희 부부는 백기만을 비롯한 예술인들과 친분이 두터웠다. 이들은 창립 장소를 내준 데 이어 학교 사무실도 경북문학협회 사무실로 쓰게 했다. 이곳은 유치환, 구상, 구왕삼, 이윤수, 임삼, 이기홍, 신동집, 정막 등 문화예술인이 자주 찾았고, 최옥희와 친했던 김송배, 이화진, 서정희, 전경화 등 여성 문인들도 빈번히 출입하는 '문화살롱'이었다.

대구근교에서 향리 친구들과
대구 근교에서 향리 친구들과 함께한 백기만(맨 뒤 소나무 사이). 〈대구문학관 제공〉
경북문학협회 창립 후 1958년 백기만은 협회 기관지인 '문학계'를 창간했다. '문학계'는 중앙집권적인 문학체계에 대한 반발로 발간됐다. 경북예술단체연합회(예련)편집자였던 백기만은 후기에서 "문학마저 중앙집권제로 쏠린다면 그러한 통폐를 저항하기 위해 마땅히 지방은 지방대로 새로운 개화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운영난으로 문학계는 창간호 하나만 발행되고 종간됐다.

백기만은 향토문화 발전에 힘썼지만 관에서 주는 상을 받은 적은 없다. 와병 중이던 1963년에 수상한 '대구시민문화상'은 민간 주도의 상이었다. 화려한 상은 아니었지만 대구시민의 이름으로 그의 활약을 인정해줬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1969년 작고한 백기만은 국립신암선열공원에 안치됐다. 이후 1991년 7월15일에는 이설주, 최영호, 이윤수, 전상렬, 여영택, 이민영, 전인규, 윤장근 등이 뜻을 모아 두류공원 내 인물 동산에 백기만 시비를 세워 그의 삶을 기렸다. 최미애기자 miaechoi21@yeongnam.com

공동기획 : 대구광역시

▨ 참고자료=대구문학관 근대작가특별전-향토문학계의 거목, 시인 백기만을 기리다(2015) 팸플릿, 대구문단인물사(윤장근), 문학과언어학회 문학과 언어 제26집(2004년 5월 )의 '백기만론'(김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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