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욱 큐레이터와 함께 '考古 go! go!'] 신라와 가야 고분 발굴의 성과 ④ 신라의 성립과 발전과정...신라의 강력한 왕권, 무덤이 말해준다

  • 김대욱 영남대박물관 학예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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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1-14   |  발행일 2022-01-14 제21면   |  수정 2022-01-14 09:26
대구 달성고분군 37호분 1곽 출토 금동관(출처 국립대구박물관)
대구 달성고분군 37호분 1곽 출토 금동관. <출처:국립대구박물관>

필자는 작년 하반기부터 우리 지역 고대사회로 인식되고 있는 신라와 가야의 고분 발굴 성과를 소개하고 있다. 오늘은 신라·가야 고분 발굴을 진행하면서 '신라의 성립과 발전 과정'에 대한 고고학적 인식이 어떻게 정립되었는지 설명하고자 한다. 1970~80년대를 지나면서 우리 지역의 고분 발굴이 성행하였고 이로 인해 각 지역의 고분 축조 연대가 가닥을 잡아가면서 지역사적 관점의 지역 사회상 복원이 시작되었다.

3세기까지는 진·변한 소국 상태
4세기쯤 지배층인 신라사회 성립
경주 출토 신라식목곽묘가 증명

대구·경산·부산 등 대형 고분군
신라 중심지 고총 규모엔 못 미쳐
횡혈식석실묘로 한강 진출 방증


그리고 신라의 중앙인 경주와 각 지역 고분의 출토유물에 대한 비교가 이루어지고 그 관계가 논의되기 시작하였으며 관계사적 연구도 진행되었다.

이러한 논의는 '신라가 언제 성립되어 어떤 과정을 거쳐 본격적인 고대국가로 성장하는가'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신라와 가야 고고학의 본래 연구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초 경주 구정동목곽묘가 발굴된 이후 경주와 그 주변지역, 그리고 영남 각 지역의 목곽묘 발굴이 이어졌다. 이를 통해 대략 기원후 3세기 중엽까지는 진·변한 각 소국이 병렬적 상태에서 경제적 관계를 기반으로 다소 느슨한 정치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고 보았다. 그러다가 4세기 초나 전반 즈음에 사로국을 정점으로 하여 각 소국이 그 하위에 배치되며 지배와 피지배라는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를 신라사회의 성립이라고 할 수 있다.

신라사회의 성립을 고고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기원후 3세기 말 또는 4세기 초 경주와 주변 지역에서 출현하는 신라식목곽묘이다. 또한 4세기 전반에는 적석목곽묘가 출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총이 등장한다. 이러한 고분(고총)에는 각종 금속공예 위세품과 신라양식의 토기가 부장되는데 이 무덤들의 분포는 금호강 이남의 낙동강 이동 지방과 금호강 이북의 낙동강 이동·이서 지방이라는 범위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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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 대릉원 일원 전경. <출처:문화재청>

특히 금속공예 위세품은 각 지방의 고분에서 출토되는 것과 경주지역 고분 출토품과 그 양식적인 면에서 별 차이가 없어 경주에서 제작되어 분여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최근에는 각종 위세품이 지방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나 지방의 주도적인 입장에서 위세품을 취득하였다고 보는 입장도 있다).

즉 신라가 대략 4세기 후반에는 신라권역을 장악하고 지방 지배를 개시하였던 것으로 추론하고 있다. 참고로 이러한 신라 성립 배경은 경주가 철과 소금을 장악하고 물자를 집산하였던 육로 관문이었기 때문에 지정학적으로 아주 유리한 조건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또 이 시기 신라가 광역의 정치체로 성장하는 과정을 신라식목곽묘에서 출토되는 유물 즉 고식도질토기, 갑주 등 철제 무기, 곡옥 등 위세품의 확산 과정으로 설명하기도 하였다.

이후 고총이 출현하여 크게 성행하다가 쇠퇴하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를 통해서도 신라 국가의 형성과 발전 과정을 고고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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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산 임당동과 조영동고분군 일대. <촬영 석진화>

즉 마립간기 지방통치방식을 흔히 간접지배방식이라 하는데, 신라가 광역의 정치체를 형성하면서 간접지배방식을 통해 지방을 통치함으로써 경주와 지방 사이의 관계나 지방 간에도 상호관계에 상당한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는 4세기 중엽 신라만의 독특한 묘제인 적석목곽묘가 출현하여 지배층의 묘제로 자리잡는 과정과 부합된다. 왜냐하면 적석목곽묘에 나타나는 고고학적 현상은 고대사에서 마립간기라고 칭하는 시기와 일치하여 신라가 본격적인 국가로 출발하였음을 보여주는 징표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후 4세기 중후반부터 6세기 초반까지 경주 분지 내에는 황남대총, 서봉총, 금관총, 천마총 등과 같은 대형의 적석목곽분이 축조되며 신라고분의 실체 및 마립간기 왕릉의 존재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같은 시기 낙동강 이동의 여러 지방에서도 대형 고총고분군이 축조되는데 대구 달성고분군, 경산 임당동과 조영동고분군, 부산 복천동고분군, 부산 연산동고분군, 양산 북정리고분군, 의성 금성산고분군, 선산 낙산리고분군 등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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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욱 영남대박물관 학예연구원

이들 고총은 각 지방의 지배자 집단이 축조한 것이지만 경주 중심지 고총의 규모나 부장품에는 훨씬 미치지 못하므로 신라 중앙의 집단과 상하의 위계를 두고 정치·경제적으로 밀접한 상관관계를 유지하였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후 신라의 고분은 석실묘로 축조된다. 이 시기는 신라가 이른바 중앙집권적 귀족국가로서 통치 체제를 정비하고 율령을 반포하며 사회적 발전을 도모하는 시기로 6세기 중반 이후 삼국통일을 완성하는 7세기 중엽까지로 볼 수 있다.

이때에는 낙동강 이서 지역의 가야 세력을 정복하고 서쪽으로 백제와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나아가 한강유역에 진출하는 한편, 동해안을 따라 그 영역을 북쪽으로 확장하였는데 횡혈식석실묘와 단각고배 및 부가구연장경호의 존재가 이를 방증한다.

대표적인 유적이 충주 누암리고분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7세기 후반에 들면서 경주와 그 주변 지역 일부를 제외하고는 점차 고분문화가 쇠퇴하게 되는데, 이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화장묘가 성행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영남대박물관 학예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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