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지대] '분도 우화'라는 아름다운 책과 디자인

  • 전가경 도서출판 사월의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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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5-16   |  발행일 2022-05-16 제25면   |  수정 2022-05-16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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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가경 (도서출판 사월의눈 대표)

'점과 선' '이상한 나라의 숫자들' '세상에서 제일 큰 집' '빨강 풍선' '강낭콩'. 나의 서재 한쪽에 나란히 꽂혀 있는 책들의 제목이다. 36쪽에서 70여 쪽까지의 다양한 분량에 무선으로 제본된 이 귀여운 제목의 책들은 '분도 우화' 시리즈의 일부이다. 내가 이 책을 처음 접한 건 아마도 배우자와의 '서재 합치기'를 통해서였던 걸로 기억한다. 표지에 적용된 제목 서체서부터 인쇄와 본문 조판까지 책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느낌은 예스러웠다. 그런데 단순히 '낡았다'는 이유로 이 책을 과거의 인쇄물 중 하나로 치부하기엔 묘한 단단함이 느껴졌는데, 그 이유는 책의 콘텐츠 때문이었다. 특히 '빨강 풍선'이라는 책이 예사롭지 않았다.

책 표지엔 별색을 적용한 듯한 새빨간 풍선과 함께 어느 한 서양 남자아이의 뒷모습이 실려 있다. 그 흔한 출판사명도 없이 오로지 '알베르라 모리스 빨강 풍선'이라고 찍혀 있다. 책을 펼치면 영화의 한 장면에서 갖고 왔을 것으로 쉽게 추정되는 스틸컷들이 글과 함께 등장한다. 놀라웠던 것은 어떤 장면은 흑백으로, 또 어떤 장면은 컬러로 인쇄되었다는 점. 일종의 환상 동화이기도 한 이 책은 주인공 소년이 색색깔의 풍선들에 매달려 하늘 위로 날아가는 장면으로 끝나고, 이 초현실적인 마무리로도 모자라 이어지는 페이지에는 영어 원문이 수록되어 있었다. 영문과 국문을 함께 수록하는 이 편집의 배짱은 무엇인가 싶어 판권면을 들춰보니 1982년에 발행된 책. 아동 출판 시장이 중산층의 부상과 함께 급격하게 팽창하고 있던 시기였다. 이 범상치 않은 영상의 책 버전인 '빨강 풍선' 정체가 궁금해 구글링해보니, 이 책은 1956년 프랑스에서 제작된 단편 영화로서 1956년 칸 영화제 단편 영화 황금종려상을 포함해 수많은 영화상의 주인공이었다. 그리고 난 이런 예술성을 겸비한 작품을 아동 대상 양서로 제시한 기획과 안목에서 이 책의 품격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 책을 출판한 곳은 널리 알려졌듯이 경북 왜관에 자리한 분도출판사였다. 출판사는 1909년 세워진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이 운영하는 곳으로, 선교 일환의 문화사업이었다. 종교를 포함해 다양한 장르의 책을 발행하며 모토처럼 '시대의 징표를 함께 읽어가는' 출판사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리고 올해 60주년을 맞이하며 기념행사도 얼마 전에 가졌다고 한다. 출판 측면에서 분도 출판사의 가장 주목할 만한 면모 중 하나는 인쇄소를 소유하고 있다는 점. 1962년 중고 하이델베르크기 2대로 시작한 출판은 1997년 자동제본기까지 갖춤으로써 작은 지역 사회 안에서 보기 드문 자가 제작 시스템을 구축해낸 셈이다.

전통적으로 인쇄와 출판은 문화의 꽃이었다. 그것은 한 지역사회를 지탱하는 지식의 총체이자 한 시대가 반영되는 거울상이었다. 상업의 최전선에서 대중적 화두를 선도해 나가는 출판이 있는가 하면, 가장 낮고 어두운 곳에서 등불을 자처하는 출판도 존재했다. 나에게 분도출판사의 '분도 우화'는 예술 및 문학이 이중적으로 변주되는 '영상적' 명저들의 향연이다. 이 시리즈가 출간되기 시작한 1970년대는 정치적으로 암흑기였던 것만은 분명하지만, 당시 어린이들에게는 참신한 '인쇄된 영상'이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 책의 가장 아름다운 지점은 소박한 물성이다. 인스타그램에 최적화된 화려한 후가공과 불필요한 하드커버 제본에서 볼 수 있는 일부 출판 제작 관행에서 '분도 우화'가 내뿜는 소탈한 시각적 아우라는 시대를 초월한 아름다움의 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전가경 (도서출판 사월의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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