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빗소리를 듣다

  • 이미연 영남대 기악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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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5-19 08:19  |  수정 2022-05-19 08:21  |  발행일 2022-05-19 제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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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연<영남대 기악과 교수>

내가 애정하는 음악 중 대다수는 마이너(단조)의 곡들이다. 화창한 날에는 그런 곡들을 치기에는 다소 어색한 기분이 된다. 비가 내리는 날에는 '얼씨구나 이런 날이지'하며 얼른 피아노 앞에 앉곤 한다. 피아노를 치다가 쉬고 싶을 때는 음대 앞 소나무 숲을 우산을 쓰고 몇 바퀴씩 왔다 갔다 하기도 한다. 다양한 빗소리들, 쏟아지는 소리와 추적추적 내리는 소리, 그리고 나무 잎사귀 끝에 달린 빗방울의 떨어지는 소리 등 비와 관련된 많은 소리에 도움을 받는다.

비 오는 날 하늘을 보면 프랑스의 인상주의 작곡가 드뷔시가 떠오른다. 대다수의 인상주의 곡들이 그렇듯 음색과 음향이 색채감 있는 이미지를 만들어 내면서 특히, 비가 오는 날에 들으면 더 깊게 빠져들게 된다.

드뷔시의 '아라베스크'는 우리를 위로해주는 이미지를 그려내는 것 같다. '아라베스크'라는 뜻이 아라비아풍의 아랍 무늬를 나타낸다고 해도 그의 음악에서 나오는 화려하고 환상적인 색채의 화성과 아르페지오를 들으면 내리는 비와 함께 지나간 슬픈 기억들이 다 씻겨 내려 간다. 비가 어느 정도 그치고 난 뒤에 상쾌한 바람과 젖은 냄새를 느끼고, 살랑거리는 잎사귀들을 보러 밖으로 나간다. 잎사귀 끝마다 달린 빗방울들이 어김없이 떠올리게 하는 음악은 쇼팽의 '24개의 프렐류드 중 15번'이다. '빗방울 전주곡'으로 더 알려진 이 음악은 거칠게 내리는 소나기가 아닌, 조용히 떨어지는 보슬비 같은 느낌의 곡이다. 마이너 곡을 연주하는 학생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슬픔에도 여러 가지가 있듯이 빗물과 눈물에도 여러 가지가 있고 우리가 연주하는 마이너 곡들에도 다양한 감정이 표현되어야 한다고.

물론 비 오는 날이 항상 슬프다는 건 아니다. 주로 학교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다 보니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를 맞고 웃으며 뛰어다니는 학생들을 볼 때도 있다. 나 또한 덩달아 입가에 웃음이 지어지는 그런 광경들 말이다. 그럴 때는 무더운 여름에 소나기가 쏟아지는 모습을 그린 드뷔시의 '판화' 중 3번 '비 오는 날의 정원' 이 떠오른다. 드뷔시는 "자연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인식하지 않고 그 안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이렇듯 드뷔시의 음악이 그려내는 여러 가지 자연의 이미지는 우리의 기억 모퉁이에 버려져 있던, 우리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던 이미지와 거기에 연관된 느낌들을 되살려내고, 풍파를 겪으면서 좁아져 가는 우리의 시야를 다시 넓혀준다. 그친 줄 알았던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한다. 이미연 <영남대 기악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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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연 영남대 기악과 교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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