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타워] 고교 시절의 그 서점과 재수 시절의 제일서적

  • 백승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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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3-21 06:53  |  수정 2024-03-21 06:49  |  발행일 2024-03-21 제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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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운 문화부장

경남 거창에서 고교 시절을 보냈다. 이웃한 합천에서 자란 필자에게는 첫 객지 생활이었다. 모든 게 낯설었다. 마음 둘 곳이 없었다. 가파른 길 위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애써 숨이 찰 때까지 뛰어 보기도 했지만 그뿐이었다. 학교를 마치면 하숙집에서 나오질 않았다. 그때 처음 '고독'과 '외로움'을 알게 됐다.

그나마 유일한 즐거움은 서점에서 죽치고 놀기였다. 학생들이 많은 도시라 수험서가 책꽂이를 가득 채웠지만, 구석 자리에는 문학 서적도 간간이 들어왔다. 유난히 소설을 좋아했던 필자는 시간이 날 때마다 서점으로 향했다. 플라스틱 간이 의자에 걸터앉아 읽고 또 읽었다. 마음에 드는 문장이 나올 때면 준비한 메모지에 옮겨 적었다. 그 메모지가 한 권의 책이 되기도 했다. 습한 종이 냄새가 무척이나 좋았다. 후각이 나를 상기시켰다. 서걱거리며 넘어가는 책 소리는 설레게 했다. 청각이 나를 상기시켰다. 서점 주인 아저씨는 그런 필자를 내쫓지 않았다. 읽기만 하고 사지는 않는 '진상 고객'인데도 말이다.(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주인아저씨는 필자가 '합천 촌놈'이라는 것을 친구들을 통해 알았다고 한다.)

졸업 후 대구에서 재수를 시작했다. 모든 게 낯선 객지 생활이었다. 하루하루가 덜컥거렸다. 하숙집 가까운 곳에 '제일서적'이 있었다. 파란색 간판이 마음에 들었다. 공부하기 싫은 날이면 학원 대신 제일서적을 찾았다. 1층 입구에 들어설 때마다 새 책 냄새가 후각을 상기시켰다. 그 냄새가 은은한 비누 향처럼 밀려왔다.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은 담백한 향, 그 향기를 즐기며 서점 이곳저곳을 어슬렁거렸다. 난초처럼 갈래갈래 퍼져나가는 서점의 내부는 깊고 넓은 바다처럼 보였다. 읽고 또 읽었다. 기초나 개론 수준의 딱지를 떼고 깊이 있는 주제의 책으로 넘어갈 때면 으쓱해하기도 했다. 참고서 살 돈으로 좋아하는 소설 한 권을 들고나올 때면 마음 한편이 가벼워졌다.(여태 어머니는 이 사실을 모르신다.)

고교 시절 거창의 그 서점은 문을 닫았다. 제일서적도 마찬가지다. 서점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한국서점조합연합회가 2년마다 발간하는 '2024 한국서점편람'에 따르면 지난해 대구 군위군과 경북 청송·봉화·울릉군에는 서점이 한 곳도 없는 '서점소멸지역'으로 분류됐다. 서점이 하나뿐인 '소멸 위험지역'은 전국 25곳 가운데 경북이 4곳(고령, 성주, 영양, 의성)이나 됐다. 가슴 아픈 일이다. '소멸'이라는 단어가 마치 '멸종'처럼 읽혀 편치 않다.

다행히 의미 있는 움직임이 대구에서 일어나고 있다. 디자인·출판·기획 전문회사인 '밝은사람들'이 대구와 경북 '서점소멸지역'에 서점을 차릴 수 있도록 원스톱 지원에 나선다고 한다. 이 회사는 올해 설립 25주년을 맞았다. 최근 출판·마케팅 및 공간디자인 전문가로 구성된 전담 TF팀을 꾸리고 군위·청송·봉화·울릉군에 서점 창업을 돕기로 했다.

예비창업자가 서점을 열 점포를 확정하면 현지답사에 나선다. 이후 실내외 공간디자인부터 도서 공급, 홍보, 마케팅 등 운영 전반을 무료로 컨설팅한다. 서점 창업 후 북 토크, 출판기념회 등의 행사도 할 수 있게 돕는다. 현재 청송에서 서점을 운영하려는 예비창업자와 협의 중이라고 한다.

매번 강조하지만 서점(책방)은 단순히 책을 파는 공간이 아니다. 고교 시절의 그 서점과 재수 시절의 제일서적처럼…. 밝은 사람들이 일으킨 잔물결이 거센 파도가 되길 바란다.
백승운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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