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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명령에 따랐을 뿐!?'은 권위에 복종하는 인간 행동의 근원을 이해하기 위해 명령에 따르는 이들의 뇌에서 일어나는 인지신경학적 과정을 밝힌 책이다. 〈게티이미지뱅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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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 A. 캐스파 /지음/동아시아/380쪽/2만원/380쪽/2만원 |
악(惡)은 평범하다. 유대인 학살 주범 아이히만은 사악한 악마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한나 아렌트의 전범재판 참관 보고서는 말한다. 그는 평범한 시민이었다고. 아이히만의 지인들도 그가 온화한 성품을 지녔다고 했다. 그런 이가 만행을 저지른 이유는 뭘까.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으로 설명한다. 누구나 당연히 여기고 행하는 일이 악이 될 수 있다는 것. 전범재판 당시 아이히만은 그저 "상관의 명령을 따랐다"고 답했다. 그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국가적 폭력에 가담한 이들은 재판 과정에서 하나같이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말한다. 12·3 비상계엄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이들도 상당수가 "그저 지시에 따랐다"고 항변하고 있다. 정말 명령에 복종했을 뿐일까? 단순히 명령에 따르는 것만으로도 부당하고 잔혹한 행위들을 할 수 있는 걸까?
신간 '명령에 따랐을 뿐!? 복종하는 뇌, 저항하는 뇌'는 인지신경과학자인 저자가 권위에 복종하는 인간 행동의 근원을 이해하기 위해 쓴 책이다. 명령에 따르는 이들의 뇌에서 일어나는 인지신경학적 과정을 밝힌다. "한나 아렌트가 뇌과학자였다면 바로 이런 책을 썼을 것"이라는 평을 받는다.
책은 방대한 사회심리학 및 인지신경과학 자료를 분석한다. 이를 통해 집단 폭력 사태가 일어나는 원인에 대한 다방면의 지식을 제공한다. 특별한 점은 한정된 연구 틀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러 실험 결과를 검토하고, 집단학살이 발생했던 르완다, 캄보디아를 방문해 실제 학살의 가해자들을 인터뷰한 후 결과를 종합해 낸다.
책에 따르면 저자는 실험실에서 8년 동안 타인에게 (안전한 수준으로) 고통을 주는 전기 충격을 가하라고 피험자에게 명령했다. 그 결과 4만5천건의 명령 중 거부된 것은 약 1천340건(2.97%)에 불과했다. 또 저자는 복종하는 사람의 뇌에서 책임감과 공감 능력, 죄책감을 담당하는 영역과 회로에서 활성이 떨어지는 현상을 확인했다. 이런 연구들은 악의 평범성에 대한 과학적 해답으로 느껴지게 한다. 여전히 명령과 복종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나라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책은 이를 두고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핑계를 대는 것은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문제가 된 행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는 시도라는 것. 그러면서 우리 사회가 집단적 폭력에 물들지 않도록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폭력의 악순환을 끊으려면 "집단학살을 저지른 자의 책임을 묻는 것도 중요하지만, 집단학살을 저지르는 데 이바지하는 무의식적 신경 활동 같은 복잡한 역학을 이해하기 위해 섬세한 학제 간 접근 방식을 취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저자인 에밀리 A. 캐스파는 벨기에 겐트대 실험심리학과 부교수로, '도덕 및 사회적 뇌 연구실'을 이끌고 있다. 브뤼셀자유대에서 인지신경심리학 석사와 사회인지신경과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박사 학위 준비 중 같은 대학교에서 법과학·법정신의학 과정을 이수하기도 했다. 권위와 복종에 대한 인지신경과학적 연구인 박사 학위 논문 '강압은 인간 뇌의 주체의식을 변화시킨다'를 발표한 후 심리학계·과학계 등에서 주목받았다. 관련 연구를 지속해 2017년에는 국제 심리학회의 라이징스타 후보에 올랐고 2023년에는 사회신경과학회의 얼리커리어상을 수상했다.
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

조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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