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걸 교수의 오래된 미래교육] 노인과 깨달음

  • 정재걸 대구교대 명예교수
  • |
  • 입력 2025-03-10  |  수정 2025-03-10 08:09  |  발행일 2025-03-10 제12면

[정재걸 교수의 오래된 미래교육] 노인과 깨달음
정재걸〈대구교대 명예교수〉

참으로 오랜만에 대전에서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섰다. 아내가 기차표를 다 예매해 주었지만 막상 집을 나서려니 귀찮다는 생각이 앞선다. 나이가 들수록 평범한 일상에서 벗어나는 일에 대해 설렘과 기대보다는 두려움과 걱정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에고는 끊임없이 미래를 예측하려고 하기에 노인은 변화를 두려워한다. 경산역에서 무궁화호를 타고 동대구역에 내려 KTX를 갈아탔다. 지정된 좌석에 다른 젊은이가 앉아 있다. 휴대폰에 있는 좌석표를 보여주니 자기 자리가 세 자리 앞이라고 그 자리에 앉으라고 한다. 괘씸한 생각이 들었지만 참고, 그 자리에 앉으니 뒤에 앉은 아줌마들의 수다 소리가 귀에 거슬린다.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노려본다. 노인이 되면 노여움이 많아진다. 노인의 에고는 자신의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아줌마들이 조용해진다.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 있으니 어깨와 허리가 아프고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들이 떠오른다. 그 생각 중 하나가 '내 삶의 목표는 무엇일까?'였다. 놀랍게도 이 질문에 대해서는 더 이상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삶의 목표를 떠올리기에 이제 나는 너무 늙었던 것이다. 노인에게 삶의 목표는 없다. 미래가 없으니 그저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것이 전부일 뿐이다. 약속 장소에 30분 일찍 도착하니 친구는 벌써 와 있었다. 왜 이렇게 빨리 나왔느냐고 하니 아무도 없는 집에 앉아 있으나 찻집에 앉아 있으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얼마 전 상처한 친구는 자식들도 멀리 살고 있어 집안이 적막강산이라고 했다. 또 하루하루는 지루하게 흘러가지만 한두 달은 금방 흘러간다고도 했다.

노인이 되면 에고는 점점 불편해진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몸은 점점 쇠약해지고 아픈 곳은 점점 더 늘어난다. 미래를 기대할 수 없기에 마음은 더 조급해지고 참을성도 없어진다. 에고의 관점에서는 이런 변화가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지만 깨달음의 측면에서는 아주 좋은 징조다. 에고가 점점 취약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깨달음은 내 몸과 내 마음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내 몸과 마음을 나라고 여겨 동일시하는 것이 에고다. 눈에 보이는 것은 내가 아니다. 내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컴퓨터 모니터는 내가 아니다.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 몸도 보이고 내 생각도 보인다. 그렇기에 그것 역시 내가 아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는 자가 나다. 그러나 눈이 눈을 볼 수 없고 귀가 귀를 들을 수 없듯이 보는 자는 보이지 않는다. 아는 자는 알 수 없다. 그것을 '순수의식'이라 부르던 '한 물건'이라 부르던 생각으로는 결코 알 수 없는, 도달할 수 없는 그것이 보는 자다.

오프라 윈프리와의 대담에서 에크하르트 톨레는 의식과 에고의 분리가 깨달음이라고 했다. 그는 깨달음을 통해 자신의 에고가 완전히 떨어져 나갔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에고의 소멸은 생각과 자신의 동일시가 소멸되었음을 말한다. 그는 생각이 일어나도 그것을 '나'로 여기지 않는다. 그냥 생각이 일어남을 '알아차리고' '바라보고' '받아들이고',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 '깨어있고' '지금에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알아차리고, 바라보고, 받아들이고, 깨어있고, 지금에 있는 주체는 누구인가? 스파이라는 '알아차림에 대한 알아차림'에서 알 수 없는 그 무엇을 '배경 자아'라고 이름 붙였다. 보는 자는 온갖 영상이 펼쳐지는 스크린과 같다는 것이다. 영상 속의 내가 스크린을 알 수 없듯이 배경 자아에 대한 모든 묘사는 어긋날 수밖에 없다. 톨레가 말한 '알아차리고' '지금에 있는' 주체는 배경 자아가 아니라 또 다른 에고이다. 배경 자아를 체험한 에고가 또 다른 에고를 만들어 낸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톨레의 설명은 그 대담을 듣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쉽게 설명하기 위한 방편이다.

깨닫기 직전 톨레는 극심한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깨어나는 순간 톨레는 '나는 더는 나 자신과 같이 살 수 없어'라고 말했다. 그는 그때 '두 개의 나'가 있음을 알게 되었고 이때 '나 자신'이 에고를 말하는 것이라면 같이 살 수 없다고 말하는 나는 누구인가를 탐구하다가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다. 톨레와 비슷하게 많은 사람이 에고의 고통을 통해 에고와의 동일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노인이 되면 누구나 겪게 되는 몸의 고통과 마음의 고통은 그것과의 동일시를 벗어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깨달음을 얻으면, 즉 몸과 마음과의 동일시에서 벗어나면 몸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두려움의 고통, 조급함의 고통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대구교대 명예교수〉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사회인기뉴스

영남일보TV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

영남일보TV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