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만진의 문학 향기] 재주는 곰이 넘고

  • 정만진〈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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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04-11  |  수정 2025-04-11 08:47  |  발행일 2025-04-11 제19면
[정만진의 문학 향기] 재주는 곰이 넘고
정만진〈소설가〉
2007년 4월11일 '제5 도살장'의 미국 소설가 커트 보니것이 세상을 떠났다. '제5 도살장'은 독일 드레스덴에 있던 포로수용소로, 짐승을 죽이던 도살장을 수용소로 썼다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다. 커트 보니것은 1945년 2월 네 차례의 드레스덴 대규모 폭격과 대량 학살 당시 이곳 포로수용소에 실제로 갇혀 있었다.

'제5 도살장'은 거의 반쯤 자서전으로 여겨질 만큼 작가 자신의 제5 도살장 체험을 담고 있다. 주인공 빌리 필그램은 1968년 비행기 사고를 당한 이후 뇌수술을 받은 인물이다. 소설이 시작되면 빌리 필그램은 자신이 어떤 행성에 납치되어 알몸으로 전시되어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서사는 제5 도살장으로 시간여행을 떠난다.

'제5 도살장'은 뛰어난 반전(反戰)소설로 인정된다. 소설은 제2차 세계대전을 담고 있지만 1969년 발표 당시 작가 본인이 부시 정권을 격렬히 비판하며 반전운동에 가담하고 있다는 이유로 여러 박해에 시달렸다. 심지어 그의 소설을 서가에 꽂아두지 않겠다고 반발한 학교도 있었다.

'제5 도살장'은 미국 도서관협회 '1990~1999년 가장 많이 읽는 책' 조사에서 67위를 차지했다. '2000~2009년 가장 많이 읽는 책'에는 56위에 올랐다. 그만큼 주목받는 작품이었지만 부시 정권 반대자의 저서라는 이유로 갖은 탄압을 받았던 것이다. 결국 미국 연방대법원이 나서서 '교육청이 특정 책을 학교 도서관에서 제거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보니것은 언론 인터뷰에서 "드레스덴 폭격은 종전을 앞당기지도, 독일군을 약화시키지도, 포로들을 구하지도 못했다. 오직 한 사람 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무익했다"면서 "그 한 사람은 드레스덴 이야기를 책으로 써서 큰 돈을 번 나 자신"이라고 비판했다.

1623년 4월11일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우리와 중국은 의리로 군신, 은혜로 부자와 같다. 선왕(선조)께서는 평생 서쪽을 등지고는 앉지도 않았다. 광해는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다"가 반정 명분이었다. 보니것의 말을 차용하면,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한 인조반정에서 이익을 본 사람은 누구였을까?

재주는 곰이 넘지만 돈은 누가 번다고 했다. '제5 도살장'과 '인조실록' 읽기는 그 속담의 속뜻을 헤아려보게 한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표어, 정말 잘 지었다!

정만진〈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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