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 .15] 예천 삼강강당 ‘백세청풍’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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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05-29   |  발행일 2013-05-29 제20면   |  수정 2013-05-29
고고한 선비의 절개를 백세토록 전하다
[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 .15] 예천 삼강강당 ‘백세청풍’
생육신 중 한 사람인 어계(漁溪) 조려(1420~1489)를 기려 세운 채미정(함안군 군북면 원북리)에 걸려 있는 ‘백세청풍’ 편액.

백세토록 길이 전할 맑은 기풍을 뜻하는 ‘백세청풍(百世淸風)’은 조선시대 지식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글귀였다. 지금도 많은 이들이 좋아하고 있다. 영원토록 변치 않는, 고고한 선비가 지닌 절개를 대변하는 이 글귀는 선비들이 주택이나 서원, 정자 등에 편액으로 걸고 주위의 바위에 새기기도 했다. 또한 붓글씨 휘호의 소재가 되기도 하고, 비석에 새기기도 했다. 불천위(不遷位·영원히 제사 지내며 기리도록 국가나 유림이 인정한 훌륭한 인물의 신위) 제사 때 족자로 사용하는 가문도 있다.

‘백세청풍’은 끝까지 군주에 대한 충성을 지킨, 중국 상(商)나라 말기의 전설적 형제 성인인 ‘백이(伯夷)와 숙제(叔齊)’ 이야기에서 유래한다.

[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 .15] 예천 삼강강당 ‘백세청풍’
예천 삼강강당에 걸려 있던 ‘백세’ ‘청풍’ 편액. 이 원본은 한국국학진흥원에 보관돼 있다. 청풍자(淸風子) 정윤목(1571~1629)이 중국의 백이숙제 사당(이제묘)에 있는 것을 모사해 와서 새겼다고 한다.


◆‘백세청풍’ 유래

‘사기(史記)’ 열전에 나오는 내용이다. 백이와 숙제는 상나라 말엽 작은 제후의 나라 고죽국(孤竹國) 영주의 아들이었다. 영주인 아버지는 막내였던 숙제를 후계자로 지목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숙제는 맏형인 백이에게 자리를 양보하며 나라를 떠났고, 백이 역시 부친의 유언을 존중해 숙제를 왕위에 오르게 하고자 몸을 피했다. 고죽국은 할 수 없이 가운데 아들이 왕위를 잇도록 했다.

백이와 숙제는 고죽국을 떠나 어진 제후로 이름 높던, 훗날 주나라 문왕이 되는 희창에게 몸을 의탁했다. 희창은 작은 영주들을 책임지는 서백의 자리에 있었다. 얼마 후 희창이 죽고 그 아들 희발(무왕)이 집권했고, 그는 상나라 폭군 주왕(紂王)을 제거하려 했다. 희발의 부하 강태공은 뜻을 같이하는 제후들을 모아 전쟁 준비를 시작했다. 이때 백이와 숙제는 희발을 찾아와 다음과 같이 간언했다.

“부친이 돌아가신 후 아직 장사도 지내지 않았는데 전쟁을 할 수는 없다. 그것은 효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 주나라는 상나라의 신하 국가이다. 어찌 신하가 임금을 주살하려는 것을 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

천하가 모두 폭군을 제거하려는 의거에 환호했지만, 백이와 숙제는 생각이 달랐던 것이다. 이에 희발은 크게 노하여 백이와 숙제를 죽이려 했으나, 강태공이 의로운 사람들이라 말해 죽음을 면했다. 이후 희발은 상나라를 토벌하고 주나라의 무왕이 되었다.

백이와 숙제는 상나라가 망한 뒤에도 상나라에 대한 충성을 버릴 수 없다며 수양산(首陽山)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으며 살았다. 이때 왕미자라는 사람이 수양산에 찾아와 “그대들은 주나라의 녹을 받을 수 없다더니 주나라의 산에서 고사리를 먹는 일은 어찌된 일인가”하며 책망했다. 이에 두 사람은 고사리마저 먹지 않았고, 마침내 굶어 죽게 된다.

이후 백이와 숙제는 끝까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충절을 지킨 의인을 지칭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후세 사람들은 고죽국 수양산(산서성에 위치. 하북성이라는 주장도 있음)에 이들의 삶을 기리는 사당(夷齊廟·淸聖廟라 불림)을 짓고, 영원히 이어질 그들의 충절의 기리는 ‘백세청풍(百世淸風)’ 비석도 세웠다. 중국의 ‘청성(淸聖)’이라 불리는 그들의 청풍(淸風)이 백세에 영원하라는 염원을 담은 것이다. ‘백세청풍’ 글씨는 주자(朱子·1130~1200)의 것이다.

우리나라 황해도 해주에도 수양산이 있어 그곳에 청성묘(淸聖廟)와 백세청풍비를 그대로 모방해서 세웠다. 조선 숙종 때에 이르러 서원·사우가 남설되는 풍조에 따라 해주 유생들이 지명이 같은 해주의 수양산 기슭에 1687년(숙종 13) 사당을 세우고 백이와 숙제 두 사람을 제향하며 그 절의를 추모하였다. 1701년에는 황해도 유생들의 소청에 의해 숙종이 ‘청성묘(淸聖廟)’라는 어필 편액을 하사했다. 그 뒤 황해도관찰사 이언경이 주자의 글씨인 ‘백세청풍’ 네 글자를 얻어와 돌에 새긴 뒤 사당 뜰에 세웠다. 백세청풍비 뒷면에는 청성묘의 내력과 백이·숙제의 절의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청풍자(淸風子) 정윤목이 백이숙제 사당에서 베껴 온 ‘백세청풍’ 등

‘백세청풍’ 편액이나 비석은 전국 곳곳에 남아 있다.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 삼강강당(三江講堂)에 걸려 있던 것은 그 대표적 편액이다. 삼강마을은 임진왜란 직후 정승을 지낸 약포(藥圃) 정탁(1526~1605)의 셋째 아들 청풍자(淸風子) 정윤목(1571∼1629)이 터전을 잡아 살던 곳이다. 청풍자는 나이 19세 때 중국 사신으로 가는 아버지를 따라 중국으로 갔다. 그때 백이숙제의 사당을 지나다가 그곳에 있는 비석의 ‘백세청풍’이란 글자에 감동해 그것을 실물 크기로 베껴 왔다.

그는 이 글을 좋아하여 자신의 호를 ‘청풍자(淸風子)’라 정하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이 삼강마을에 건립한 삼강강당에 ‘백세청풍’을 새긴 편액을 건 뒤, 혼탁한 정치현실을 등지고 그곳에서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으로 일관했다. 서애(西崖) 류성룡(1542~1607)과 한강(寒岡) 정구(1543~1620)에게 학문을 배운 그는 특히 문장과 서예에 뛰어났다. 그의 초서는 당대의 제일로 통했다.

‘백세’와 ‘청풍’으로 나뉜 이 편액의 원본은 한국국학진흥원에 보관돼 있다.

경남 함안의 채미정(采薇亭·군북면 원북리)에도 ‘백세청풍’ 편액이 걸려 있다. 생육신 중 한 사람인 어계(漁溪) 조려(趙旅·1420~1489)가 단종 폐위 후 귀향해 여생을 보낸 곳에 그의 절개를 기려 지은 정자이고, 그의 절개를 백이숙제의 절개에 비유해 이 편액을 단 것이다. 정자는 어계를 비롯한 생육신을 기려 1703년에 지은 서산서원(1713년 사액서원이 됨)이 건립된 후 서원의 부속건물로 1735년에 세워졌다.

근처에 있는, 어계가 낚시로 세월을 보냈다는 ‘고바위’의 절벽에도 ‘백세청풍’이 새겨져 있다.

충남 금산의 청풍서원(淸風書院·금산군 부리면 불이리)은 고려 말 삼은 중 한 사람인 야은(冶隱) 길재(1353~1419)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678년 창건된 서원이다. 이곳에도 ‘백세청풍’을 새긴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이 비석은 당시 금산군수가 주선해 1761년 해주 청성묘의 비석 글씨를 본떠 와 새긴 것으로 전한다.

이 밖에 함양의 일두(정여창)고택에도 ‘백세청풍’ 편액이 걸려 있고, 안동의 학봉(김성일)종택은 학봉 불천위 제사 때 ‘백세청풍(百世淸風) 지주중류(砥柱中流)’ 탁본 병풍을 사용한다.

백세청풍 글씨가 우리나라에 건너오게 되는 과정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중국 수양산 이제묘에 있는 ‘백세청풍’ 글씨를 모사해 오는 도중, 배를 타고 황해(또는 압록강)를 건너다가 큰 풍랑을 만나게 된다. 풍랑이 심해져 배가 곧 뒤집힐 듯하자 대경실색한 일행은 중국 명필이 남의 나라로 건너가는 것을 천지신명이 방해하는 것이라 생각해 모사한 네 자 중 마지막 자인 ‘풍’ 자를 잘라 물 위에 던졌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풍랑이 잠잠해져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나머지 한 자를 베껴 올 수도 없고 해서 ‘풍’ 자는 우리나라 명필의 것으로 채워 넣기로 했다. 그래서 앞의 석 자와 마지막 자는 필치가 다르다고 이야기한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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