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 .20] 칠곡 송림사 ‘대웅전’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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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08-07   |  발행일 2013-08-07 제20면   |  수정 2013-08-07
고찰을 거닐다 숙종 임금의 체취를 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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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불국사 대웅전 건물. 이 ‘대웅전(大雄殿)’ 편액 글씨가 숙종의 글씨로 전하고 있는 팔공산 송림사의 ‘대웅전’ 편액 글씨와 같음을 알 수 있다.

공주 마곡사에는 현재 남아 있는 건물 중 창건 연대가 가장 오래된 영산전(보물 제800호)이 있다. 영산전(靈山殿)은 석가모니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후 영취산(靈鷲山)에서 설법하던 모습을 담은 ‘영산회상도’를 모시는 법당인데, 이 법당의 편액 ‘영산전(靈山殿)’은 조선 세조의 글씨로 전해오고 있다. 이와 관련한 이야기가 전한다.

세조는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 김시습이 이곳에 은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그를 달래기 위해 마곡사를 찾았다. 하지만 매월당이 미리 알고 절을 떠나버려 만날 수가 없었다. 세조는 매월당을 그리며 “김시습이 나를 버리고 떠났으니 연을 타고 갈 수 없다”고 한 뒤 연(輦·임금이 타는 가마)을 버리고 소를 타고 왕궁으로 돌아갔다. 당시 세조가 타고 왔던 연은 마곡사에 보관돼 있다. 영산전 편액 글씨는 그 당시 세조가 직접 써서 하사했다고 한다. ‘영산전(靈山殿)’ 글씨 옆에는 ‘세조어필’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다.

이 편액처럼 사찰의 편액 중 이런저런 인연으로 임금의 글씨, 소위 어필(御筆·왕과 왕비의 글씨)로 된 것이 곳곳에 있다. 그중 사찰의 본전인 ‘대웅전’ 중 보기 드물게 왕(숙종)의 글씨로 전하는 것이 있는데, 칠곡 송림사 ‘대웅전’이 대표적 예다. 매우 큰 편액으로 누구나 선호할, 방정하면서도 부드러운 힘이 느껴지는 글씨다. 그런데 경주 불국사 ‘대웅전’ 편액이 똑같은 글씨체다. 속리산 법주사 ‘대웅보전’ 편액도 보면 같은 인물이 쓴 글씨임을 알 수 있다. 어느 것이 원본일까.



◆방정하고 부드러운 숙종의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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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인물의 글씨로 보이는 세 편액. 위부터 송림사 ‘대웅전’, 불국사 ‘대웅전’, 법주사 ‘대웅보전’.
칠곡 송림사의 ‘대웅전(大雄殿)’ 편액은 오래전부터 숙종의 글씨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 정확한 연유가 무엇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대웅전 건물이 정유재란(1597년) 때 불탄 후 숙종 재위 때인 1686년 기성대사에 의해 중창됐다는 기록이 있다. 송림사는 당시에 숙종이 ‘대웅전’ 편액 글씨를 직접 써서 내린 것으로 사찰 안내문에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기록이나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검은색 바탕에 양각의 글씨 부분은 흰색이 칠해진 통상적인 형태다. 편액 틀도 단순하고 소박한 편인데, 처음 달 때의 것인지는 몰라도 매우 오래된 편액으로 보인다. 가로 366㎝, 세로 160㎝나 되는 큰 편액으로 4개의 판자를 붙여 만들었고, 편액을 꽉 채운 글씨는 방정하면서도 획이 부드러운 느낌을 줘 보는 이들이 호감을 갖게 한다. 현재는 대웅전 해체 복원 중이라 창고 안에 보관돼 있다.

그런데 불국사의 ‘대웅전’ 편액을 보면 송림사의 것과 거의 같은 글씨임을 알 수 있다. 이 편액 글씨가 언제 어떻게 걸리게 되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불국사 대웅전도 숙종 3년(1677)에 기와를 새로 바꾸고 숙종 34년(1708)에는 서쪽 기둥을 교체했다는 기록이 있는 만큼, 당시에 숙종의 글씨를 구하거나 송림사의 편액 글씨를 베껴와 편액을 만들어 달았을 수도 있다. 1676년 숙종과 인현왕후 민씨의 칙명으로 자수 비로자나불탱을 만들어 불국사에 봉안케 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와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다.

불국사 편액도 송림사 것과 유사하나 틀 부분에 화려한 문양이 있고, 아래 양쪽에 구름 무늬로 조각한 장식이 있는 점이 다르다. 바닥은 크고 작은 가로 판자 5개를 붙여 만들었다.

그런데 법주사 ‘대웅보전’ 편액 글씨를 보면, 두 ‘대웅전’ 글씨와 흡사하다. 모두 같은 인물의 글씨라면, 두 편액보다 ‘대웅보전’ 편액이 앞서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대웅보전’ 글씨 중 ‘보’ 자를 뺀 나머지 세 글자를 모사해 편액을 만든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법주사 대웅보전도 1715년(숙종 41)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때 숙종의 편액 글씨를 하사받았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대웅보전’ 편액 글씨는 두 ‘대웅전’ 글씨와 달리 금니(金泥)로 돼 있다. 옛날에는 어필의 경우 금니로 하는 관례가 있었다.

송림사·불국사 ‘대웅전’과 법주사 ‘대웅보전’ 글씨를 보면 ‘웅’ 자의 경우 약간의 차이점을 지적할 수는 있으나 여러 차례 덧칠하는 등의 과정에서 생겨난 것으로 판단되고, 원본은 같은 글씨로 봐도 될 듯하다. 법주사 편액은 5년에 걸친 대웅보전 보수공사 당시(2005년 준공) 칠을 다시 해 건 것으로, 새 편액인 것처럼 보인다.

법주사 ‘대웅보전’ 편액에 대해서는 법주사의 스님이나 종무소 직원 모두 누구의 글씨인지 모르고 있었다. 어떻든 숙종의 편액 글씨가 뛰어나 선호했음은 물론, 억불정책 정권 아래서 왕의 글씨 편액을 걸어놓음으로써 관리나 양반들의 횡포를 최소화하려는 측면에서도 숙종 재위 중에 불사를 하면서 그 어필 편액을 걸고자 했을 것이다. 붓글씨는 물론 시문에도 상당한 수준에 올랐던 숙종은 조선 초기부터 왕실에서 꾸준히 답습한 송설체를 바탕으로 하면서 그 근원인 왕희지체를 혼합, 방정하고 부드러운 송설체풍 글씨를 썼다.



◆어필 현판들

송림사·불국사 ‘대웅전’, 마곡사 ‘영산전’ 편액과 함께 사찰 곳곳에 어필 편액이 전해오고 있다.

순천 선암사의 ‘대복전(大福田)’ 편액은 조선 23대 왕인 순조(재위 1800~1834)의 친필이다. 순조는 어머니가 선암사에서 득남을 기원하는 불공을 드린 후 태어났고, 성장한 후 본인이 태어난 선암사가 큰 복밭이라는 뜻의 ‘대복전’이라는 글씨를 써 하사했다고 한다. 글씨는 즉위 전에 써 준 것이다. 함께 써서 하사한 것으로 보이는 ‘천(天)’ 자, ‘인(人)’ 자 편액도 있다.

헌종(재위 1834~1849)은 합천 해인사에 ‘사방무일사(四方無一事)’라는 편액을 내렸다. 당시 안동 김씨와 외척 간의 권력 다툼이 극에 달해 정국이 혼란스러웠던 상황에서 나라 안 사방이 아무런 불상사 없이 태평하도록 부처님께 기원한 왕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다. 해인사의 ‘길상(吉祥)’이라는 편액도 헌종의 글씨다.

해남 대흥사에는 임진왜란 때 활약한 승병 대장인 서산대사 휴정과 사명대사 유정, 뇌묵당(雷默堂) 처영의 영정을 모신 사당인 표충사가 있다. 사액사우인 이 ‘표충사(表忠祠)’ 편액 글씨는 정조(재위 1776~1800)가 썼다. 1789년에 이 사당 건립을 허락하면서 ‘표충(表忠)’이라는 묘우 이름을 짓고, 편액 글씨 ‘표충사’를 직접 써서 하사한 것이다. 힘이 느껴지는 장중한 필치의 행서로 검은 바탕에 금니 글씨로 돼 있다. 한 개 판자에 한 글자씩 세 개 판자로 이뤄져 있다. 정조는 역대 왕 중 대표적 명필로 꼽힌다.

팔공산 파계사에 있는 ‘천향각(天香閣)’ 편액도 정조 글씨다. 경기도 고양에 있는 흥국사(고양시 덕양구 지축동)는 영조가 어머니 숙빈 최씨의 원찰로 삼고 약사전을 증축한 뒤 ‘약사전(藥師殿)’ 편액을 직접 써 하사했다. 지금도 그 편액이 걸려 있다. 단정한 해서로 결구가 치밀하다.

물론 궁궐 전각에도 여러 어필 편액이 걸려 있다. 한편 농암종택에는 선조가 하사한 ‘적선(積善)’이라는 글씨를 편액으로 만들어 걸어 놓고 있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당당한 필치의 선조 글씨, 후대 왕들에 지대한 영향 끼쳐

■조선 임금들의 글씨체


조선의 왕들은 사람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서화에도 뜻을 두고 여기로 즐겼다. 세종은 그림이 뛰어나 난죽병풍을 남겼다 하고, 문종과 성종은 원나라 조맹부의 서체인 송설체로 쓴 작품을 남겼다. 송설체는 조선왕실의 서예 취향을 대표하는 서풍으로 각광받았고, 이런 분위기는 17세기까지 이어졌다.

가늘면서도 유려한 송설체를 따랐던 15~16세기 국왕의 글씨는 선조 임금을 계기로 조금씩 변화가 있게 된다. 선조는 선왕의 글씨를 본받는 왕실의 관행을 따르면서도 송설체의 근원인 왕희지 서법을 탐구했다. 목판, 첩, 병풍 등 다양한 자료가 전해지는 선조 글씨는 유려한 행서나 초서 작품도 있지만 대자로 쓴 당당한 필치의 작품 등을 통해 서예가로서 다양한 보폭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선조의 글씨는 후대 왕들에게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선조의 자신감 있는 필치는 숙종(재위 1674~1720)에 이르러 다시 한 번 변하게 된다. 숙종 재위 연간은 조선 왕실에서 꾸준히 답습되어 온 송설체가 조선식 송설체로 자리 잡으며 중심적인 서풍으로 발전한다. 숙종은 송설체를 바탕으로 하면서 그 근원인 왕희지체를 혼합해 방정하고 부드러운 글씨를 썼다.

숙종의 글씨풍은 영조가 계승해 더욱 유려한 송설체를 구사했다. 왕희지 글씨에 깊은 관심을 드러낸 영조는 두 서풍을 기반으로 독특한 개성이 가미된 어필을 많이 남겼다. 영조 이후 등극한 정조는 석봉체, 숙종·영조의 글씨 등을 공부해 굵고 강직한 필획이 특징인 나름의 서풍을 구사했다. 당나라 안진경의 글씨를 본받아 두툼한 필획과 자형을 구사하기도 했다.

고종은 나름대로 서예에 취미가 있어 그가 남긴 편액 글씨가 상당수에 이르며, 안진경체를 토대로 획이 굵고 자형이 방정한 해서뿐만 아니라 자유롭고 호방한 느낌의 행서도 잘 썼다.
김봉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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