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광 20년 문경 걸어온 길 가야할 길 .1] 폐광 그 암울했던 이야기

  • 남정현
  • |
  • 입력 2014-01-20   |  발행일 2014-01-20 제13면   |  수정 2014-01-20
1994. 7. 30, 문경은 그날 ‘검은 눈물’을 소리없이 흘렸다
마지막 탄광 ‘은성광업소’ 문닫은 날
20140120
은성광업소 자리에 세워진 문경석탄박물관은 탄광의 실제 갱도를 살려 체험코스로 활용하고 있다. <문경석탄박물관 제공>
20140120
1994년 7월 56년간의 채탄을 마치고 광업소 문을 닫는 종업식에 참가한 김호건 당시 은성광업소 노조위원장을 비롯한 광부들이 아쉬움을 달래며 마지막 기념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문경석탄박물관 제공>


국내 제2의 탄전지대였던 문경에서 탄광이 마지막으로 문을 닫은 지 올해로 꼭 20년째다. 폐광으로 광부와 그 가족이 떠나면서 문경은 다른 어느 곳보다 심각한 인구감소와 지역경기 침체의 어려움을 겪었다. 탄광이 문을 닫으면서 16만명이 넘었던 주민은 절반 이하로 줄었고 이렇다 할 대체산업을 마련하지 못했다. 다행히 문경은 천혜의 자연자원을 바탕한 관광산업으로 돌파구를 찾았고, 오미자 등 농업분야에서도 빛을 보기 시작했다.

영남일보는 폐광 이후 문경이 겪어 온 어려움과 극복과정을 되돌아보고, 외국 폐광도시나 국내 폐광지역의 개발 성공 사례와 함께 연구 전문가의 의견을 들어 문경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모색해 본다.

석탄서 석유로 연료가 바뀌면서
1985년부터
석탄산업합리화 사업 시작
은성광업소를 마지막으로
문경 지역 73개 탄광 모두 폐업

1994년 7월30일 오전 10시 문경시 가은읍 왕릉리 은성광업소 마당에는 적게는 몇 년에서 많게는 수십 년간 막장에서 일을 했던 800여명의 광부가 모였다. 작업복 차림이 아닌 제법 말쑥하게 차려입고 삼삼오오 모여든 광부의 얼굴에는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다.

간단한 종업식과 송별연을 끝으로 56년간 국민의 연료인 연탄을 만드는 석탄을 공급해 온 은성광업소가 문을 닫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은성광업소 노동조합 위원장이면서 폐광합의서에 근로자 대표로 마지막 도장을 찍었던 김호건씨(63)는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콧잔등이 시큰하다”고 말했다.

이날을 마지막으로 문경에 있던 탄광은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문경탄전의 탄광은 일제강점기인 38년 은성광업소를 시작으로 석탄산업 합리화로 문을 닫기까지 73개의 크고 작은 탄광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가장 대표적인 은성광업소는 석탄공사에서 운영했으며, 대성그룹의 모태가 됐던 대성탄좌 문경광업소는 62년 대성그룹의 창업주에 인수된 뒤, 93년 폐광 당시 824명의 종업원이 있었을 정도로 규모가 큰 광산이었다.

47년 창립해 91년 폐광한 봉명광업소도 1천여명의 직원을 고용할 정도로 문경탄전에서 3위권에 드는 탄광이었다.

탄광이 한창 번창했을 때 탄광촌은 말 그대로 흥청망청이었다.

마을마다 요정이 서너개씩 있었으며, 개도 만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은성광업소 앞 가은시장에서 75년부터 신발가게를 했던 조성모씨(64)는 “광업소에서 월급이 나오는 날이면 한 켤레 1천200원짜리 장화를 팔아 그 당시 하루 30만원의 매출을 올렸다”며 “지금은 하루 한 켤레도 팔지 못하지만 그때는 가은에만 신발가게가 12곳이나 됐다”고 회상했다.

문경탄전에 폐광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국내 석탄의 생산비는 높아지고, 연료도 연탄에서 석유로 바뀌면서 석탄광산이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탄광에 국비를 보조하는 등 광업을 지원했던 정부는 85년부터 석탄산업 합리화사업단을 만들어 본격적인 한계 광산의 정리에 나섰다.

87년 단산광업소를 시작으로 문경탄전에서 그때까지 운영되던 탄광 30곳이 94년을 마지막으로 모두 문을 닫았다.

폐광의 여파는 당장 문경지역 인구 감소로 나타났다.

문경지역의 광부는 많을 땐 7천200명을 웃돌았지만 이들 중 대부분은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문경을 떠났다.

74년 16만1천125명이던 문경의 인구는 85년 13만9천811명, 95년 9만5천815명으로 줄었고 지난해 말 주민등록상 인구는 7만6천245명으로 탄광 전성기에 비해 절반 이하로 뚝 떨어졌다.

문경시내 경기는 실종됐고, 빈집은 늘어만 갔다.

광산이 호황을 누릴 때 문경사람은 폐광을 생각지도 못했고, 당연히 아무런 대비책도 세우지 않았다. 탄광이 문을 닫자 그저 정부나 탄광업체만 쳐다보며 대체산업을 마련해달라고 요구했을 뿐이다.

몸이 성한 사람은 다른 도시로 일자리를 찾아 떠났고 농토라도 있는 이는 농사로 전업을 했다.

하지만 몸에 진폐증을 갖고 있는 상당수 광부는 이곳을 떠나지도 못하고 병의 진행 정도에 따라 병원이나 집에서 치료를 하며 겨우 목숨을 이어가고 있다.

지하에서 채탄을 해야 했던 문경의 탄광은 크고 작은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은성광업소의 경우 79년 10·26사태 다음날인 27일 갱내 화재로 44명이 한꺼번에 희생되는 등 56년간 모두 166명의 산업전사가 목숨을 바쳤다.

김호건 노조위원장의 주도로 이들을 위한 위령탑이 94년 세워졌으며, 지금도 석탄공사 창립일인 11월1일 위령제를 매년 지내고 있다.

폐광 뒤 남은 것 중 하나는 을씨년스럽게 버려진 탄광 흔적과 갱내에서 흘러나오는 폐수다.

90년대 중반까지는 이러한 잔재가 곳곳에 남아 탄광촌을 흉물스럽게 만들었으나 시커먼 폐석더미를 흙으로 덮은 뒤 나무를 심어 복원하고, 갱내수 정화시설을 갖추면서 탄광이 있었던 산들이 조금씩 제모습을 찾아갔다.

특히 광부가 떠나고 텅 빈 사택이 모두 철거되고 시커먼 물이 흐르던 하천도 맑아지면서 지금은 문경에서 더 이상 탄광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탄광 한 곳은 옛 모습을 남겨뒀다 관광코스로 활용해도 됐을 것이라고 후회할 정도로 말끔히 치워졌다.

폐광으로 탄광이 모두 없어졌지만 그 문화는 여전히 남아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이 문경사람의 개방적 사고방식이다.

탄광을 찾아 전국에서 모여든 사람으로 탄광촌이 형성되다 보니 텃세가 적었고 이는 인근 지역에 비해 외지 사람이 문경에 정착하기 쉬운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주인의식이 없다는 지적도 있지만 폐광 이후 이러한 태도가 문경을 최고의 관광지로 만드는 데 한몫을 했다는 분석이다.

이런 개방성의 기질에다 백두대간의 수려한 자연경관, 경제회생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바친 문경시민은 머지않아 광산이 번창하던 시절 못지않은 번영을 다시 누릴 것이라는 기대 속에 오늘도 지역 발전에 힘을 모으고 있다.

문경=남정현기자 namun@yeongnam.com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기획/특집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