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성석제 영주선비를 이야기하다 .1] 영주가 낳은 유학의 영원한 스승 ‘회헌 안향’

  • 손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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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8-19   |  발행일 2014-08-19 제13면   |  수정 2014-09-11
이 땅에 성리학 들여온 ‘安子’… 인재양성으로 고려 개혁 꿈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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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를 시작하며

영주는 유서 깊은 선비의 고장이다. 선비정신의 핵심가치를 창출하고 유지해 온 유학의 본향으로, 현재까지도 그 정신적 자산을 이어오고 있다. 특히 주자학을 최초로 도입한 회헌 안향부터 조선 건국의 기틀을 마련한 삼봉 정도전까지, 선비정신을 실천하고 이어온 수많은 인물을 배출한 곳이 바로 영주다. 여기에 충절의 상징인 순흥과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 등 유학의 숨결이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다.

영남일보는 선비의 고장 영주를 재조명하는 시리즈를 오늘부터 총 6회에 걸쳐 연재한다. 시리즈는 영주 출신 선비들의 삶과 그들의 정신이 함축된 이야기를 중심으로 다룬다. 원고집필은 한국문단을 대표하는 소설가 성석제씨가 맡는다. 시리즈 첫 회는 한국 성리학 역사의 출발점이 된 유학자 회헌 안향(晦軒 安珦)에 대한 이야기이다. 공자와 주자처럼 안자(安子)로 불리며 유학의 ‘영원한 스승’으로 존경받는 안향의 주요 일대기를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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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주 소수서원 입구에 있는 숙수사지 당간지주. 안향은 어린 시절 숙수사를 오가며 유교 경전을 읽고 학문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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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향이 태어난 영주 순흥면 석교리에서는 ‘안향 향려비’를 볼 수 있다. 안향의 업적을 기리고 그의 고향마을임을 알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1. 백두대간 지기가 응결한 자리서 학문 쌓아

안자(安子), 곧 안향(1243~1306)은 소백산 아래 흥주성 평리촌(현재 영주시 순흥면 석교리로 인근이 회헌로로 명명됨)에서 태어났다. 안향의 아버지 안부(安孚)는 흥주성에 속한 향리였으나 과거의 잡과에 해당하는 의업(醫業)에 급제함으로써 중앙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다.

안향의 생가 터에서 보면 뭇 봉우리를 거느린 소백산 비로봉이 흥주의 너른 들판 곳곳을 너그럽게 굽어 살피는 듯하다. 안향은 이처럼 백두대간의 지기가 응결한 자리에서 어린 시절 가학(家學)으로 공부의 기초를 닦는 한편, 끊임없는 자습(自習)을 통해 학문을 쌓았다. 특히 숙수사(현재의 소수서원 자리)를 오가며 독서를 하면서 뜻을 세웠다.

성장기에 안향이 공부를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는 세연지(洗硯池)라는 이름에서도 드러난다. 세연지는 순흥면 석교리 산기슭에 있었던 연못이다. 현재 세연지를 표시하는 비석에는 ‘죽계 서쪽 송학산 밑에 학교촌이 있고 바위 사이에 작은 샘이 있는데, 그 밑에는 네모진 못이 있으니 회헌 선생께서 소싯적에 벼루를 씻던 못이다’라고 적혀있다. 중국에서 서성(書聖)으로 칭해지는 진나라 왕희지의 묵지(墨池), 송나라의 대문호 소동파가 버린 먹물을 먹고 자라 온몸이 시커멓게 되었다는 묵어(墨魚)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안향이 호를 회헌(晦軒)이라고 지은 것은 호가 회암(晦庵), 회옹(晦翁)인 중국의 주희(朱熹, 1130~1200)를 본받은 것이다. ‘회(晦)’는 본디 그믐처럼 어둡다는 뜻으로 학문에 자질이 부족하여 깨달아 아는 것이 없음을 자처하는 겸손한 태도이다. 주희가 말했듯이 어둠에서 광명으로 나아가는 길은 단 하나가 있을 뿐으로, 그것이 공부였다. 공부, 독학(篤學)에서 누구보다 놀라운 성취를 보인 사람이 바로 안향이었다.

어린 시절을 순흥에서 보내고 아버지를 따라 수도인 개경으로 간 안향은 불과 17세의 나이에 과거에 급제한다. ‘어릴 적부터 단정하고 중후하여 부질없는 말과 웃음이 없었다’라고 전해지는 대로, 안향은 과묵하고 진중한 성격과 집중력이 탁월했다. 이 때문에 약관이 되기도 전인 어린 나이에 신진 사대부의 반열에 들었던 것이다.

안향은 왕의 측근에서 문서 출납을 담당하는 교서랑이 되었다가 학문과 문장을 인정받아 직한림원, 내시원을 거쳐 빠르게 승진했다. 그의 나이 27세 때인 1270년, 강화도에서 삼별초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강화에 억류되었다가 기지를 발휘해 탈출하기도 했다.



#2. 종교·미신 폐해…유교적 가치관에 대한 갈망

안향은 32세부터 3년간 상주판관 등의 지방관으로 재직하면서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종교와 미신의 폐해가 얼마나 민생을 피폐하게 만드는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고려의 국교가 불교였고, 불교의 최고 권위자인 국사(國師)가 정치와 종교에 모두 관여하고 있었다. 심지어 절에서 군대를 거느렸고, 세금은 전혀 내지 않았다. 팔관회나 연등회 같은 종교행사가 국가 예산으로 집행되는 형편이었다. 몽고의 외침과 무신란으로 생긴 내환을 치료해줄 새로운 가치관, 사상의 혁신이 절실히 필요했다. 이 무렵 안향은 자신이 처한 시대와 혼미한 풍속에 대해 이런 시를 남겼다.



곳곳에 향과 등을 밝혀 부처에게 빌고/ 집집마다 퉁소 불며 귀신에게 복을 비니/ 두어 칸 되는 공부자(孔夫子)의 사당에는/ 풀만 무성할 뿐 사람 하나 없이 적막하구나.



시에서 보듯 그의 정신적 지향점은 철저하게 유교, 그것도 공자의 유학이었다.

안향이 상주판관이던 시절의 일화에서 그것을 엿볼 수 있다. 당시 여자 무당 세 명이 자신들이 귀신을 모셨다고 하면서 수많은 백성을 현혹하고 있었다. 무당들은 남쪽부터 군과 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는 곳마다 허공에서 나오는 것처럼 사람 소리를 만들어 냈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마치 지체 높은 벼슬아치가 길을 갈 때 구종이 길을 비키라고 위세등등하게 을러대는 것 같았다.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너도 나도 달려가 제사를 지내고 재물을 바쳤고, 심지어 고을 수령까지도 합세했다.

무당들이 상주에 들어오자 안향은 즉시 그들을 잡아다 곤장으로 때리고 칼을 씌워 가두어버렸다. 무당은 귀신이 재앙을 내릴 것이라고 갖은 푸닥거리와 사설로 위협을 해댔지만 안향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며칠 뒤에 무당이 죄를 싹싹 빌고 나서야 석방을 해주었고, 이로써 무당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은 단숨에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안향은 그때그때의 문제를 해결하는 대증적인 방책이 아닌, 뭔가 체계적이고 근본적인 시스템과 사상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는 인간의 자기 수양, 사회적 도의의 진작과 풍속의 순화는 유학에 달려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익히 알고 있는 유학 고전인 육경과 정통 유학의 가르침인 ‘수기치인(修己治人)’의 가치관은 더 이상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론에 치우쳐 공허했고, 세밀하고 분명한 뭔가가 부족했다.



#3. 주희와 닮은 안향, 주자학을 처음 도입

지방행정을 성실하게 잘 처리한 안향은 중앙 관계로 다시 부름을 받았다. 이후 국립교육기관인 국자감의 사업, 우사의대부, 좌우사낭중을 거쳐 고려유학제거(高麗儒學提擧)가 되었다. 고려유학제거는 원나라가 만든 정동행성의 벼슬로 학교와 제사, 교양, 전량, 저술 등의 일을 관장하는 것인데 당시 좌부승지로 있던 안향이 최초로 임명된 것이었다.

안향보다 80여년 전에 태어난 주희의 혁신적 업적은 생애 대부분을 바쳐 새로 주석을 붙이고 편집한 유교의 핵심 경전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을 1190년에 ‘사자(四子)’라는 이름으로 한데 모아 새롭게 간행한 일이었다. 그는 또한 ‘주자가례’를 통해 예학(禮學)을 집대성하고 두 곳의 서원을 재건하고 일곱 곳의 학교를 세웠으며 죽는 날까지 붓을 놀리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충렬왕 16년(1289), 안향은 왕과 공주를 호종하여 원나라 수도 연경에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우연히 주자전서(朱子全書), 곧 주희 필생의 업적이 집약된 전집을 접하게 된다. 이때 안향은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큰 사상적 충격을 받았다. 연경에서 다섯 달가량 체류하는 동안 그는 주자전서를 손수 필사하고 관련 서적을 수집했다. 그는 주자학을 배워야 할 이유에 대해 후일 이렇게 적었다.

‘내가 일찍이 중국에서 주자의 저술을 보니 성인의 도를 밝히고 불교를 배척하는 공이 공자에 필적할 만하였다. 공자의 도를 배우려면 주자를 배우는 것보다 우선할 것이 없다.’

안향이 주희에게 매료된 것은 서로 간에 유사한 점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 사람은 복건성의 시골 우계(尤溪) 출신, 다른 한 사람은 소백산 아래 흥주 출신이었다. 두 사람은 똑같이 제도적인 신분 상승의 경로인 과거를 거쳤고, 지방관을 비롯한 관료생활을 역임했다. 또 두 사람 모두 기복신앙과 불교에 의문을 품었고 미신을 배격했다. 교육과 공부의 힘을 믿었다.

안향은 새롭게 진화한 유학 사상인 주자학을 도입하고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으로 국가를 바로세우려고 했다. 주자학 관련 서책을 적극적으로 들여오고 과거 시험관(지공거)을 현명한 선비 중에서 선발했으며 수많은 제자를 모아 가르쳤다.

한편으로 그는 장학재단인 양현고(養賢庫)를 확충하기도 했다. 안향이 문무백관들에게 등급에 따라 은과 포를 내게 하고 이자로 섬학전(贍學錢, 장학기금)을 조성하자는 의견을 내놓자 임금부터 흔쾌히 왕실 재산과 곡식을 내어 그의 뜻에 호응했다. 일반 백성들까지 나서서 곡식과 재물을 기부했다.

유능한 관리이자 학자, 교육자, 사상가였던 안향은 평범한 가운데서 진리를 찾는 것을 우선했다.

‘성인(聖人)의 도는 일상생활에서 윤리를 실천하는 것이다.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고, 신하가 주군에게 충성하고, 예(禮)로 집안을 다스리고, 신의로 벗을 사귀고, 자기 자신을 경(敬)으로 닦고, 모든 일을 반드시 정성으로 할 따름이다.’

안향의 사후에는 국자감과 열두 사학의 생도들이 소복을 입고 길에 쏟아져 나와 그의 은혜를 기리며 눈물로 스승의 마지막 길을 전송했다. 왕의 명에 의해 초상이 그려져 안치되고(국보 111호) 해동 성리학의 조종으로서 공자를 제사 지내는 문묘에 배향되었다. 조선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은 다른 누구도 아닌 안향을 가장 먼저 배향했다. 백운동서원은 훗날 퇴계 이황에 의해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으로 발전했다. 공자 사거 2400여년, 주자 사거 700여년, 안향 사거 600여년 뒤 안향에게도 그가 평생 마음을 다해 사숙했던 공자와 주자처럼 ‘영원한 스승’이라는 존칭이 더해졌으니 곧 그를 일러 안자(安子)라 한 것이었다.

글=성석제 <소설가·영남일보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도움말 : 박석홍 소수박물관장
공동기획 : 영주시

이야기따라 그곳&
어릴적 학문 쌓던 숙수사 터
벼루 씻던 세연지와 옹달샘…
안향의 발자취·흔적 곳곳에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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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향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유적지는 영주지역에 광범위하게 남아있다. 대표적인 곳이 숙수사 절터다. 숙수사는 안향이 어린 시절 글을 읽으며 학문을 쌓았던 곳으로 소수서원 일대에 있었다. 통일신라시대 초기에 창건한 사찰로 추정된다. 현재는 폐사되고 당간지주와 절의 주춧돌만 남아있다. 당간지주는 사찰에서 의식을 치를 때 절 마당에 부처와 보살의 행적을 그린 당번(幢幡)을 높은 깃대에 다는데, 이 깃대를 고정시켜 주는 지줏돌을 말한다. 소수서원 입구에 있는 숙수사 당간지주는 동서로 마주 서 있고, 안쪽 면에는 아무런 조각이 없지만 바깥 면 중앙에 세로띠가 새겨진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양식은 통일신라시대의 당간지주에서 흔히 볼 수 있다고 한다.

안향이 공부를 하며 벼루를 씻었던 연못인 세연지(洗硯池)의 흔적은 순흥면 석교리 송학산 기슭에 있다. 바위틈 사이에서 맑은 물이 솟아오르는 샘이 있었고, 샘 아래 작은 연못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옹달샘과 연못은 1959년 9월 사라호 태풍 때 산사태로 매몰되었다. 옹달샘은 마을 주민들이 본래 위치에서 5m 앞으로 옮겨 복원했지만, 세연지는 복원하지 못했다고 한다. 현재 회헌안선생세연지비(晦軒安先生洗硯池碑)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안향이 태어난 석교2리는 세연지에서 약 50m 떨어지 곳에 있다. 마을은 ‘安터’로 불린다. 이곳은 안향의 증조부이자 순흥안씨 시조인 자미(子美)가 터를 잡고 세거한 마을로, 안터는 순흥안씨 세거 터전이란 뜻이다. 현재 이 마을에는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611호로 지정된 ‘안향 향려비(安珦 鄕閭碑)’가 세워져 있다. 안향의 14세손 안응창(安應昌)이 1656년(효종 7)에 세운 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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