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경북여성 .6] 조선의 女中君子 ‘장계향’

  • 손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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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11-24   |  발행일 2014-11-24 제11면   |  수정 2014-11-24
경북의 신사임당…한글 최초 요리책 ‘음식디미방’ 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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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 두들마을은 장계향과 남편 이시명이 정착하면서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과 가정교육의 산실로 자리 잡았고 그 정신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현재 마을에서는 신사임당과 더불어 조선시대 대표적인 현모양처로 꼽히는 장계향을 기리는 안동장씨 예절관(사진)과 전통한옥 체험관, 음식디미방 체험관 등이 운영되고 있다.

 

부친의 ‘홀아비 제자’와 결혼

멀리 소잔등처럼 이어진 산봉우리에 시선을 두고 있는 부친의 옆모습에서 근심을 읽어낸 장계향(張桂香)의 입술에 결의의 빛이 흐른다. 지금 부친의 심사가 어떤지 남달리 이해심이 깊고 총명한 그녀로선 짐작하고도 남았다.

조금 전 부친은 지나가는 말처럼 석계의 근황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때 이미 그녀는 부친의 심중을 알아낼 수 있었다. 부친인 경당 장흥효(張興孝)는 퇴계학파를 계승한 학봉 김성일의 문인이자 당대의 학자로 인정을 받아 많은 제자들이 집을 드나들고 있었다. 석계 이시명(李時明)은 그중 부친이 매우 아끼던 제자로, 영해 나랏골에 기거하던 재령이씨 가문의 후손으로 광산김씨와 결혼하여 1남1녀를 둔 지아비였다. 하지만 얼마 전에 병으로 부인을 여의고 홀아비 신세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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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계향 영정

“어려운 형편에 처한 그 분에게 소녀가 도움이 될 듯도 합니다.”

예상치 못한 여식의 말에 놀란 경당이 눈길을 돌려 고개를 숙인 딸의 목덜미를 내려다본다. 힘든 결정을 내린 여식의 마음이 내심 대견하기도 하고 일면 애처롭기도 하다.

“정녕 그렇게 생각하느냐?”

얘기를 꺼냈을 때의 무거운 마음을 덜기라도 하듯 경당이 음성에 반가움을 섞어 되물었다. 차마 대놓고 혼사를 정하지 못하는 부친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딸이 고마웠지만 한편으론 마음이 복잡했다. 이시명이 누군가. 누구보다 아끼던 제자이긴 했지만 금년 열아홉 살인 딸에 비해 여덟 살이나 나이가 많은 터에다 전처 자식이 둘이나 딸린 계실(繼室)자리였다.

더구나 자신의 딸이 일반 여염집의 규수는 아니었다. 무남독녀에다 어릴 때부터 총명이 남달라서 열 살 남짓한 나이에 벌써 예술적 소질을 드러내는 ‘맹호도’를 그려냈고, 공부도 썩 잘해서 그 무렵 ‘소학(小學)’과 ‘십구사략(十九史略)’을 깨우쳤고, 열세 살 무렵에는 ‘백발 늙은이’와 ‘몸가짐을 조심하다’를 비롯해 ‘소소한 빗소리’처럼 주옥과도 같은 시를 지어 주위를 깜짝 놀라게 하지 않았던가.

그뿐인가. 당대의 명필인 청풍자 정윤목으로부터 절찬을 받는 등 서예가로서의 자질 역시 유감없이 발휘하기도 했다. 근래 들어서는 ‘사서오경’과 ‘근사록’ ‘심경’ 등을 읽으며 학문적 성취를 기꺼워하던 그녀였다. 만약 이번 혼사를 거절해도 당연히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어릴 적에 아버님께선 ‘가르침을 배우면 인간은 높고 낮거나 귀하고 천한 구분이 없어진다(有敎無類)’는 논어의 글을 예로 들면서 사람을 평가하는 일에 빈부나 귀천보다 사람 됨됨이, 즉 학식과 품성이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아버님이 그리 아끼시는 제자라면 인품이 뛰어날 터인데, 달리 소녀가 거리낄 게 무어 있겠습니까.”

경당은 말없이 여식의 옆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정녕 자식이지만 한 점 나무랄 데가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 타인을 향한 배려와 부모를 향한 효심이 그득한 딸이었다. 만일 아들이었으면 크게 대성할 재목이었으리라. 경당은 자신도 모르게 낮은 한숨을 내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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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계향이 남편 이시명과 함께 살았던 영양 두들마을의 석계고택. 장계향과 이시명은 1640년 이곳으로 들어와 석계(石溪) 위에 집을 짓고 청빈한 삶을 살았다. 이시명은 이때 호를 석계라 했다.

 

전처 자식을 서당까지 업고 다녀

이후 장계향의 현모양처로서의 태도는 계실로 들어간 시집살이에서도 잘 드러났다. 전처 자식이 딸린 사대부 집안의 시집살이가 녹록할 리 없었다. 그러나 새색시가 된 그녀는 전처의 어린 자식인 상일을 5리 남짓 떨어진 서당까지 매일 업고 다니며 공부를 시키는 정성까지 보였다. 이를 두고 시아버지 이함은 이웃들에게, ‘저 어미 잃은 아이는 어미를 잃은 것이 아니고 죽은 어미가 살아온 것’이라며 칭찬했다. 두 명의 윗동서가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그녀는 집안의 맏며느리 역할까지 도맡아야 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있어 삶의 어려움은 그녀의 인품과 덕성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이었다.

그녀의 온화하고 자애로운 품성은 하인을 거느리는 일에도 잘 드러났다. 어린 여종을 보살피기를 마치 자기의 딸처럼 하였고 하인들이 병이 나면 약과 음식을 먹여주어 편안하게 병을 다스릴 수 있도록 보살폈다. 또 하인들이 실수나 나쁜 짓을 저질러도 조용히 가르치고 타일러서 알아듣게끔 하였다. 따라서 모두 진심으로 그녀에게 감화되고 복종하지 않는 하인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남의 집 하인들까지 모두 그녀의 종이 되어 심부름하길 원할 정도였다.

그뿐 아니었다. 그녀는 항시 이웃의 불행을 자신의 문제처럼 여기고 해결에 나섰다. 의지할 데 없는 고아와 늙은이,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구휼하고 도와주기를 자신의 책무처럼 여겼다.

또 그녀는 시대적 아픔을 함께하며 사람들을 구하는 일에도 앞장섰다. 재령이씨 영해파 문중의 큰살림을 맡아 살면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더없이 피폐해진 민초들을 구하기 위해 집안의 재산과 곡식을 풀었다. 곡식이 떨어지자 도토리 죽을 쑤어서까지 민초들의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사대부 집안의 며느리로서 베풂과 나눔의 정신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현재 시아버지인 운악 묘소 부근에 넓게 형성된 도토리나무 군락도 그 당시 그녀가 중심이 되어 조성한 것이다. 영양 두들마을 석계고택 부근에 많이 보이는 오랜 도토리나무도 이런 남다른 사연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또한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청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했을 때, 현실에 낙담하여 세상과의 연을 끊고 은거하려는 남편과 달리 그녀는 동네 이웃들에게 의병 창의를 역설했다. 그리고 벼슬 할 의욕을 잃고 실의에 빠진 남편에게 학문에 전념하며 제자를 양성할 것을 권했다. 퇴계의 학풍을 이어받은 부친 경당의 교육을 통해 그녀는 학문이 벼슬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전인적인 교육과 선행의 수단으로 알았으며 이를 실천하려 했던 것이다. 이는 후일 그녀가 자손들에게 한 말에도 잘 드러나 있다.

“아들아, 너희가 비록 글 잘한다는 소리가 들린다 해도 나는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착한 행동을 했다는 소리가 들리면 아주 즐거워하며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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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장씨 예절관 내부 모습.

 

뛰어난 교육자이자 사회사업가 재조명

장계향은 평생을 착한 일을 즐거워하며 옳은 일 하기를 좋아하는 한편으로 여성이 가진 섬세함과 가정사에 관한 과학적 관심으로 말년에 이르러 노안으로 침침해진 시력에도 불구하고 ‘음식디미방’이란 조리서를 저술하기에 이른다. 식자재가 풍부한 요즘과 달리 먹거리가 귀했던 조선시대에 쓰여진 한글 조리서로, 동아시아 최초로 여성이 저술한 요리책이란 점에도 커다란 음식문화사적 의의를 가진 책이다.

책의 제목인 ‘음식디미방’의 ‘디’란 알 지(知)의 옛 우리말로 음식의 맛을 아는 법이란 뜻을 담고 있으며 조리서에는 조선시대 경상도지방 양반가문의 음식과 조리법을 집대성해놓았다고 할 정도로 다양한 음식과 요리에 관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우선 간단히 살펴보아도 국수와 만두, 떡을 포함한 면병(餠)류가 15종, 고기와 생선 등의 어육류가 46종, 채소와 과자류가 31종, 술에 관한 여러 제조법을 모은 게 53종, 모두 합하여 146종류나 되는 다양한 음식조리법을 체계적으로 일목요연하게 적어놓고 있다. 또한 복숭아 간수법이나 가지, 생포(生脯) 보관법과 제철이 아닌 나물 쓰는 법과 같은 내용도 들어 있어 냉장고 등의 문명의 이기가 없던 조선시대에 어떻게 음식물을 상하지 않게 보관했는지 알려주는 사료적 가치 역시 매우 높다.

이처럼 그녀는 어릴 적부터 시, 서, 화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7남3녀의 어머니이자 뛰어난 교육자로, 사회사업가로, 다방면에 걸쳐 훌륭하고 모범적인 활동을 펼친 여성으로 조선시대 신사임당과 더불어 대표적인 현모양처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당대에 이미 여중군자(女中君子)로 불릴 만큼 뛰어난 인품과 덕성, 교육적 철학을 가지고 있던 그녀는 말년에 셋째 아들인 갈암 이현일이 대학자가 되어 국가적 지도자에게 부여하는 산림(山林)으로 불림을 받고, 이조판서를 역임함으로써 나라에서 품계를 받아 정부인(貞夫人) 장씨라고 불리기도 했다.

유교적 이념이 팽배했던 조선시대에 여성이라는 신분적 한계를 초월하여 평생을 통해 학문과 예절, 덕과 효행, 그리고 사회적 봉사와 이를 위한 실천적 삶을 견지해온 그녀의 삶은 진정 우러러볼 수밖에 없는, 위대한 어머니이자 진정한 교육자의 상이라고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글=박희섭<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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