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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창의 길, 혼자 독야청청해도 의미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선대로부터 전승한 소릿제를 제자에게 물려주는 것도 명창의 중요한 소임이다. 정 명창이 북채를 잡고 제자를 위해 시창을 해보이고 있다. 소리에 임하면 눈매도 서릿발처럼 일어선다. 그녀의 소리가 종이를 찢고 허공으로 솟구칠 기세를 보이고 있다. |
경북도무형문화재 제34호
판소리 흥보가 예능보유자
19세기부터 명창 줄이어
2007년 문화관광부로부터
전국 첫 판소리 명가로 선정
홍시를 청동빛으로 얼려버린 병신년 첫 동장군. 그것에 감금된 새벽녘. 일흔 고개를 넘어서자 내 잠의 부피는 더 홀쭉해진다. 초벌잠에서 깨어나 재벌잠을 청해보지만 머릿속만 더없이 초롱거린다. 이불을 걷고 좌정했다. 단가 ‘사철가’의 첫 구절 옆에 춘향가 중 ‘쑥대머리’를 붙여 담묵처럼 풀어냈다. 지난밤 쌓였던 묵직한 피로가 단번에 증발한다. 박동실제의 심청가, 김세종제의 춘향가, 박봉술제의 수궁가. 박녹주제의 흥보가, 박봉술제의 적벽가, 평생 흉중에 품은 금쪽 같은 그 판소리가 나를 살게 하는 ‘부적’이다. 내가 판소리고 판소리가 나인 셈. 느리디 느린 진양조와 계면조의 극치인 애원성의 율조에 내 맘을 올리면 판소리꾼만이 만끽할 수 있는 극치감에 닿는다.
사위는 깜깜하다. 호흡을 가다듬고 눈을 감았다. ‘떡목(고음부의 음역이 좋지 않아 자유로운 소리 표현이 안 되고 소리가 심하게 거친 목)’ 같은 설한풍이 대문 옆에 걸린 ‘정순임 판소리 연구소’ 현판을 핥고 지나간다.
신라 천년의 고도 경주시 인왕동. 국립경주박물관이 빤히 보이는 야트막하고 더 없이 고즈넉한 동네. 멀리 자그마한 낙락장송이 보이고 가끔 그 곁을 날아가는 백학도 창 너머로 보인다. 연구소 입구에는 지난 태풍에 한쪽 팔을 잃어버렸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더욱 고졸하고 기굴한 기운을 뿜어내는 고목이 동네를 수호하고 있다. 다른 동네는 21세기라지만 여기는 아직 20세기에 한 발을 담그고 있다. 나는 이 분위기가 소리하기에 더 없이 좋다.
좌정하고 촛불을 피워올렸다. 1998년 세상을 떠난 액자 속 어머니 사진을 본다. 내 어머니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조선의 마지막 여인 같다. 한국의 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걸 경주에 알려주고 간 만능 국악인이었다. 93년 문화체육부로부터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을 받았다. 그해 어머니는 가야금병창으로 경북도 무형문화재 19호 명인이 된다. 하지만 어머니의 삶은 어머니의 예술 이상으로 신산(辛酸)스러웠다. 그 생각을 하니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젊은 시절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이좋게 찍은 흑백사진을 올려다 본다. 저 사진은 나를 과거로 데려가주는 또 다른 ‘타임머신’. 저것을 통해 내 핏줄 여행을 시작한다.
요즘은 꿈이 일상보다 더 또렷하고 짙다. 나이가 든 탓이리라. 지난밤 어머니는 나와 원격통화를 하고 싶었는지 내 꿈에 나타나 자신의 저승 전화번호까지 알려주었다. 산 공부를 들어온 몇몇 제자들은 이런 기척을 알 리 없이 곤히 자고 있다.
올해 내 나이 일흔넷. 2007년 1월 나는 경북도 무형문화재 제34호 판소리 홍보가 예능보유자가 되었다. 2013년에는 부산에서 박송희, 남해성, 최승희, 유영애, 김수연, 조소녀, 김영자, 신영희, 안숙선 등과 함께 ‘여류명창 10인10색 눈대목 공연’도 했다. 갈 길은 아직도 멀지만 그래도 소리에 입문해 첫 관문은 통과한 것 같다. 봄의 푸른 잎이 겨울까지 푸릇할 수는 없는 법. 열정은 아직도 정정하지만 솔직히 호흡과 율정(律情)은 예전 같지 않다. 그럴 때마다 숙명 같은 판소리가문이었던 외가의 가계를 더욱 뜨거운 가슴으로 품어본다.
지난해 마지막날 그토록 고대했던 귀한 책 한 권이 출간됐다. ‘장월중선의 예술세계’(민속원 간)다. 이에 앞서 2007년 6월 우리 가문에 또 다른 경사가 났다. 문화관광부로부터 ‘판소리 명가’로 선정됐다. 판소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했던 동리 신재효의 고향인 전북 고창 등 전국 판소리 명가 등 3대 이상 국악 명문가 중 우리 가문이 엄선됐기에 나는 더더욱 자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19세기부터 지금까지 우리 가문에는 숱한 명창이 줄을 이었다.
나의 인생을 둘로 쪼개면 한쪽은 호남, 또 한쪽은 영남의 소리에 닿아 있다. 한때는 목포권, 60년대 중반부터는 경주 사람이 되어버렸다. 내 소리와 기색(氣色)을 곱씹어보면 영남과 호남의 합작품 같아 어떤 때는 내가 꼭 ‘영호지음(嶺湖之音)’같다.
내 생애 첫 소리는 경주가 아니었다.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로 유명한 목포다. 내 유년의 소리는 거기서 싹텄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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