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 추 거문고 이야기]〈32〉 이황과 거문고

  • 김봉규 문화전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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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05-02  |  수정 2025-05-02 08:41  |  발행일 2025-05-02 제19면
이황과 9개월 緣을 평생 품고 산 두향…거문고로 사무친 연모의 情을 달래다
[동 추  거문고 이야기]〈32〉 이황과 거문고
충주호 장회나루(충북 단양군 단성면 장회리)에서 보이는 두향 묘소(가운데 솔숲 사이).
퇴계 이황(1501~1570)은 어떤가. 이황은 대학자이지만 빼어난 시인이기도 했다. 그는 특히 매화를 매우 사랑했고, 또 '금보가(琴譜歌)'를 쓰기도 할 만큼 음률에도 밝았다.

이황의 시 '입춘을 맞아(正月二日立春)'이다.


'누런 책 속에서 성인과 현인 마주 대하며(黃卷中間對聖賢)/ 텅 빈 밝은 방에 초연히 앉았도다(虛明一室坐超然)/ 매화 핀 창으로 또 봄소식 알게 되었으니(梅窓又見春消息)/ 거문고 줄 끊어졌다고 탄식하지 말라(莫向瑤琴嘆絶絃)'

생전 다시는 못 만나고 서신만 왕래
이황이 지어 보내온 시 '입춘을 맞아'
수시로 거문고 가락에 실어서 노래

퇴계 부음 듣고선 함께 거문고 타던
남한강가 강선대 초막 돌아와 지내다
거문고·서책 모두 태우고 세상 등져


1552년 1월2일에 지은 작품이다. 이 시는 이황의 도통시(道通詩)로 읽힌다.

시를 지은 날이 마침 입춘이었다. 방 안에 초연히 앉아 책 속의 성현을 마주 대하고 앉아 있다. 매화 핀 봄이 다시 온 것을 이야기하며, 거문고 줄이 끊어졌다고 한탄하지 말라고 읊고 있다. 이는 옛 유고 경전을 통해 성현의 마음을 알아 체득하고 그 마음을 이어가겠음을 이야기하면서, 유교 도통의 맥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있음을 한탄하지 않겠다는 것을 거문고 줄이 끊어진 것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시는 기생 두향에게 보냈던 것이라고도 한다.

이황이 50세 때 지은, 도연명의 시 '음주(飮酒)' 20수 전체에 화운하여 지은 시 중 제10수의 내용과 비교해 보면 분위기가 아주 다르다.



'손에 있는 아름다운 거문고(手中綠綺琴)/ 줄 끊기고 슬픔만 남아있네(絃絶悲有餘)/ 오직 잔속의 술만이(獨有杯中物)/ 쓸쓸한 마음 때때로 위로하네(時時慰索居)'

이황은 거문고도 탈 줄 알고 즐겼을 것으로 보이는데, 거문고의 뜻을 담은 시도 적지 않게 남겼다. 학문적 성취에 대한 염원과 자신에 대한 성찰을 담은 작품 '만보(晩步)'이다.

'자주 잊어버려 책들을 어지럽게 뽑아놓고/ 흩어진 것 다시 정리하자니/ 해는 문득 서쪽으로 기울고/ 강에는 숲 그림자 드리워 흔들리네// 지팡이 짚고 뜰에 내려 가/ 고개 들고 구름 덮인 고개 바라보니/ 아득하게 밥 짓는 연기 일고/ 으스스 산과 들은 싸늘하구나// 농삿집 가을걷이 가까워오니/ 방앗간 우물터의 아낙네 얼굴엔 기쁜 빛이 돌고/ 갈까마귀 날아드니 절기가 익었고/ 해오라기 우뚝 서니 모습이 훤칠하다// 내 인생은 홀로 무얼 하는지/ 숙원은 오래도록 풀리지 않으니/ 이 회포 누구에게 얘기할거나/ 거문고만 둥둥 타네 고요한 밤에'

마지막 넷째 단락에서는 작가 자신을 되돌아보고 성찰하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숙원(宿願: 오랜 소원)'이라는 한 단어로 함축시키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학문적 성취를 말한다. 그러나 학문의 지고한 경지는 도달하기가 쉽지 않고, 그런 자신을 되돌아보는 마음은 착잡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하릴 없이 예로부터 선비들의 벗인 거문고를 타면서 회포를 푼다는 것이다.



[동 추  거문고 이야기]〈32〉 이황과 거문고
◆거문고로 두향과 마음 나눠

이황의 거문고 관련 삶은 마음을 교류했던 두향과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 알아볼 수 있다. 거문고와 매화, 시로 마음을 나눴던 두 사람이다. 이황이 두향을 처음 만난 때는 그가 48세 때인 1548년 정월이다. 당시 이황은 단양군수로 부임했고, 두향은 그 고을 관기로 있었다. 두 사람은 나이가 30세나 차이가 있었지만, 곧 서로 끌리게 되었다. 두향은 어린 나이지만 매화를 기르는 데 뛰어나고 거문고도 잘 탔다. 게다가 시도 잘 지었다. 보통 수준을 넘어섰다. 두 사람을 정신적으로 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황과 두향은 30년 세월과 신분을 뛰어넘어 서로 각별한 정을 주고받았다. 이황은 많은 것을 갖춘 두향의 매력에 빠져들어갔다. 부임 1개월 만에 둘째 아들 채(寀)마저 잃고 마음 아파하던 때, 곁에 있던 두향은 이황에게 큰 힘이 되기도 했다.

두향은 매화를 키우는 양매(養梅)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하루는 집에서 애지중지하며 키우던 매화 화분 하나를 이황의 거처에 가져왔다. 이황이 매화를 각별히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두향은 10세 때 어머니가 죽는데, 어머니가 매화 화분 하나를 잘 길러 꽃을 피우고 있었다. 두향은 어머니가 사망한 후에도 매화분을 고이 잘 돌봤다. 기생이 되어 기적에 오를 때까지 어머니를 보듯이 애지중지하며 키웠다. 그러면서 매화에 깊은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

이황이 단양군수로 부임한 때가 마침 이른 봄이어서 매화가 꽃을 피워 은은한 향기를 내뿜고 있었고, 두향은 자신이 돌보던 매화분을 이황의 처소에 가져온 것이다. 이황은 매화분을 가져오자 처음에는 받을 수 없다며 도로 가져가라고 했다. 하지만 두향이 매화분에 대한 사연과 매화의 성품 등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받아줄 것을 간청하자, 두향의 순수한 마음을 차마 물리칠 수 없어 받아들였다.

이황과 두향은 특히 남한강가에 있는 강선대(降仙臺) 위에서 종종 거문고를 타고 시를 읊으며 노닐었다. 하지만 이황과 두향의 이런 꿈같은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가을이 미처 다 가기도 전인 10월에 갑자기 헤어져야 하는 시간이 닥친 것이다. 두 사람이 불과 9개월 만에 이별해야 하게 된 것은 이황이 풍기군수로 발령이 났기 때문이다. 단양을 떠나기 전날 마지막 밤, 두 사람은 이별의 정을 나누는 자리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두향은 붓을 들어 시 한 수를 남기며 슬픈 마음을 달랬다.

'이별이 하도 서러워 잔 들고 슬피 울 때/ 어느덧 술 다하고 임마저 가는구나/ 꽃 지고 새우는 봄날을 어이할까 하노라'

이날 밤의 이별은 결국 영원한 이별이 되어 두 사람은 1570년 이황이 세상을 하직할 때까지 생전에는 한 번도 만나지 못한다. 이황과 두향은 이별한 후에 다시 만나지는 못했지만 서신 왕래는 있었다. 두향은 이황이 지어 보내온 시 '입춘을 맞아'를 수시로 거문고 가락에 실어 노래하며 이황에 대한 연모의 정을 달랬다. 이황과 헤어진 두향은 관기의 신분에서 물러났다. 이듬해 봄, 강선대가 내려다보이는 기슭에 작은 초막을 마련한 뒤, 오로지 이황을 생각하며 평생 홀로 살았다. 이렇게 살아가던 두향에게 21년이란 세월이 흐른 후 결국 이황의 부음이 들려온다.

강선대 위 초막으로 돌아온 두향은 이듬해 봄에 거문고와 서책을 모두 태운 뒤 곡기를 끊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황의 뒤를 따른 것이다. 강선대에서 물에 뛰어들었다고도 하고, 부자차를 끓여 마시고 죽었다고도 한다. 유언은 이황과 함께 노닐었던 강선대 아래에 묻어달라는 것이었다.

강선대 아래에 있던 두향의 무덤은 후일(1984년) 충주댐이 건설되면서 물에 잠기게 되자 인근 마을 유지들이 의견을 모아 원래 무덤에서 200m쯤 떨어진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이 무덤은 해마다 두향제를 지내는 충주호 장회나루 휴게소에서 건너다 보면 작게나마 보인다.

두향이 죽은 후 이황의 제자인 아계 이산해(1539~1609)가 해마다 제사를 지내주었다. 이산해는 스승이 아꼈던 두향의 무덤을 대를 이어서 돌보며 제사 지내도록 했다고 한다.

글·사진=김봉규 문화전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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