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토크] 영화 ‘비밀은 없다’ 연홍 役 손예진

  • 윤용섭
  • |
  • 입력 2016-06-24   |  발행일 2016-06-24 제40면   |  수정 2016-06-24
청순한 눈빛 대신 광기 …“순간순간 낯선 내 모습 ‘미쳤나’ 생각도 했어요”
20160624
20160624

딸 실종후 필사적으로 흔적 쫓는 엄마
광기 어린 돌출행동 중심으로 극 견인
날 것 그대로 심리 표현 색다른 긴장감
스릴러에 멜로·미스터리 매력‘일등공신’

“내 얼굴·내 일 지겨울 즈음 신선한 자극”
이경미 감독과 많은 대화 감정신 도움
김주혁과 8년 만에 다시 부부로 호흡
8월 ‘덕혜옹주’서 또다른 연기 스펙트럼


딸 민진(신지훈)이 실종됐다. 친구의 전화번호와 알 수 없는 노랫소리만 남긴 채 감쪽같이 사라졌다. 국회 입성을 노리는 남편 종찬(김주혁)은 “어차피 집에 들어올 애”라며 이를 대수로이 여기지 않는다. 그보다는 선거를 15일 앞두고 “아이들을 보호하겠다”는 공약을 내건 자신의 이미지가 실추될까 전전긍긍하는 눈치다. 그렇다고 마냥 손 놓고 기다릴 수만은 없다. 식음을 전폐하고 머리를 싸매는 대신 엄마 연홍은 딸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한다. 하지만 실종신고를 접수한 경찰도, 학교 담임선생님도, 딸과 가깝게 지냈다는 친구 미옥(김소희)도 방관자적 입장을 취할 뿐 연홍을 극도로 경계한다. 충격과 슬픔을 지나 분노와 광기의 감정이 일기 시작한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홀로 남겨진 연홍은 이제 누구의 도움 없이 딸의 흔적을 필사적으로 추적해간다.

손예진의 얼굴에서 상큼한 눈웃음이 사라졌다. 섬세한 얼굴에 수많은 감정을 떠올리고 지워나가는 데 능한 그녀가 이번엔 믿었던 이들에 대한 분노와 절망으로 이성을 잃어가는 연홍의 복합적인 표정과 감정을 그 자리에 새겨 놓았다.

‘비밀은 없다’는 이처럼 딸을 잃고 분노하고 좌절하고 미쳐가는 연홍의 돌출된 행동을 중심으로 극을 견인해간다. 데뷔작 ‘미쓰 홍당무’(2008)에서 보여준 특유의 독창적 발상과 영화적 화법으로 주목을 받았던 이경미 감독의 8년 만의 신작은 그렇게 손예진이라는 걸출한 배우를 만남으로써 강한 추진력을 얻었다. 이 영화가 스릴러 장르라는 전형성에 머물지 않고 멜로와 미스터리를 구축하고, 예측과 반전의 틀을 여지없이 전복하는 불균질한 영화로서의 매력을 보탤 수 있었던 건 누가 뭐래도 손예진 덕이다.

이경미 감독 역시 ‘비밀은 없다’는 ‘손예진의 영화’임을 강조했다. 연홍의 불안정한 심리를 날것 그대로 드러내며 시종 색다른 긴장감을 선사한 손예진은 어떤 역이든 안정적으로 소화하는, 충무로에서도 손꼽히는 스펙트럼 넓은 연기자임을 새삼 증명했다.

▶스릴러 장르의 전형성을 탈피한 영화다. 그래서 흥미로웠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이전까지 출연했던 영화와는 많이 달랐다. 소재로만 본다면 있을 법한 이야기이고 익숙한 스릴러 장르지만 그 안에는 전형적이지 않은 캐릭터와 이야기가 절묘하게 녹아 있었다. 사실 이 점은 평소 생각해왔던 나의 영화적 접근과도 상당히 부합된다. 안정적이고 편안함을 추구하려는 나 스스로를 경계하고 있었고 새로운 변화에 대한 갈망이 있던 차였다. 무엇보다 연홍은 한국 영화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독특함이 있어서 흥미로웠다. 그녀를 통해 연기적으로 새로운 시도와 변신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도 생겼다. 시나리오를 읽는 내내 과연 어떤 그림으로 영화가 완성될지 궁금해서 출연 결정도 빨리 한 편이다.”

▶딸의 실종을 추적해나가는 역할이라 감정 소모도 무척 많았을 것 같다.

“굉장히 극적인 상황 속에서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 장면들이 많았다. 그런데 중요했던 건 딸이 실종된 후에 1일째, 3일째, 5일째 등 상황을 구체적으로 보여줘야 하는 부분들이 있어서 수위를 잘 조절해야 했다. 나중에 사건들을 파헤쳐가면서 비밀을 맞닥뜨리는 순간들 때문에 연기할 때 사실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다. ‘촬영날 그 감정을 오롯이 표현할 수 있을까’에 대한 걱정이 너무 한가득인 영화였던 것 같다. 극적인 상황 속에서의 강렬한 연기와 감정표현들이 그랬다. 그런데 상황을 즐기게 됐던 게, ‘이런 상황에서 이런 감정을 표현하면 될 것 같다’라는 지점들을 감독님과 이야기를 나누며 조금씩 다른 느낌의 연기들을 했을 때 묘한 재미가 있었던 것 같다. 고통 속에서 희열도 있었고. 그렇게 최선을 다해서 찍었던 것 같다.”

▶뭐가 제일 힘들었나.

“딸이 실종된 이후 감정의 변화를 전형적이지 않게 표현하는 게 어려웠다. 내가 생각하는 연홍의 모습과 느낌이 있는데, 감독님은 다른 것을 원할 때가 많았다. 그런 지점에서 같이 만들어 가는 재미가 있었지만 어려움도 많았다. 감정 연기는 할 때마다 어렵다. 이번 영화에서는 초반부터 딸이 실종되기 때문에 실종 이후 하루하루 지나며 피폐해지고 불안하게 되고, 딸이 돌아오지 않았을 때의 그런 느낌들이 정상이 아닌 감정으로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정상인 엄마는 이렇다’라는 것은 사실 없는 것 같다. 정형화되어 있는 우리의 시각일 뿐이고 누구나 겪어보지 않았던 일들이기 때문에 연홍의 모습이 조금 더 광적으로 비춰진 것 같다.”

▶이경미 감독 특유의 화법은 여전하다. 같이 작업해 본 소감은 어떤가.

“시나리오를 받고 ‘미쓰 홍당무’에 출연했던 (공)효진씨에게 ‘감독님 어땠어?’라고 물은 적이 있다. 그랬더니 촬영할 때는 되게 지독하다는 거다. 갑자기 웃으라고 했다가, 울어보라고 했다가 아무튼 종잡을 수 없었는데 모니터를 보면 희한하게 이야기와 제대로 맞아떨어진다고 했다. 그러면서 감독님을 되게 좋아하게 됐다고 하더라. 나는 신인감독들과 작품을 많이 한 편이다. 그 과정에서 감독님의 생각보다는 내 의견이 주로 반영이 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달랐다. 감독님의 확실한 색깔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조금 이해 안되는 부분이 있어도 감독님이 원하는 방향으로 어떤 식으로든 접근하려고 노력하고 고민했다. 나도 기존의 틀을 깨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그런 지점에서 이번 작품이 굉장히 새로웠다.”

▶당신이 생각하는 연홍은 어떤 인물인가.

“시나리오상에서도 연홍은 친절하게 설명이 되어 있지 않다. 다만 내가 생각하기에 연홍은 착하고 여우 같은 아내였다. 꿈은 많았지만 가족을 위해서 살아갔고 그것을 행복으로 여겼던 여자였다. 어쨌든 딸을 사랑하고 믿었기에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딸이 절친이라고 말하는 자혜가 진짜로 있는 줄 철석같이 믿는다. 그러다가 딸이 실종된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모든 것은 그대로인데 연홍만 조급해한다는 거다. 주변 사람들 모두 ‘딸이 집을 나간 게 한두 번이었냐’는 식으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연홍은 그때 자기 식구라고 생각해던 사람들이 모두 적수가 된 듯한 느낌을 받았을 거다. 심지어 남편조차도 말이다.”

▶모든 캐릭터들이 전형성을 탈피한다는 점에서 이야기를 장악하기 위해선 또 다른 에너지가 필요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깊고 넓게 그녀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연홍이 가장 크게 상처를 받은 건 그녀가 가장 사랑하고 가깝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무관심과 배신감이라 할 수 있다. 딸과 남편은 연홍이 생각하는 게 다가 아니었다. 연홍이 모르고 있는 그들만의 세상이 있었던 거지. 연홍의 입장에서 보면 그런 것 같다. 특히 이번 영화에서의 모성은 전형적인 모습이 아니기에 그 점을 표현하는 데 좀 더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했던 것 같다.”

▶김주혁과 ‘아내가 결혼했다’(2008) 이후 다시 부부로 만났다. 그런데 이번에도 정상적인 부부관계는 아니다. 극 중 김주혁에게 삼단 콤보로 강하게 뺨을 때리기도 했다.

“그 신이 감정적으로 정말 중요했다. 주혁 오빠의 뺨을 강하게 세 번 때리는 것과 동시에 사투리 대사를 길게 내뱉어야 하는 롱테이크 장면이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실수하게 되면 다시 찍어야 하는 상황이라 굉장히 긴장했다. 다행히(?) 테이크가 두 번에 오케이가 났다. 그때 다시 느낀 거지만 사람 자체가 참 착한 것 같다. 아무리 연기라도 감정이 상할 수 있는데 끝까지 상대방을 배려하고 편안하게 해준다. 나중에 보니 내 손이 벌겋게 부어 있을 정도로 강하게 때렸는데도 말이다. 오빠는 아직까지 목이 아프고 트라우마가 생겼다고 하더라.”(웃음)

▶전작들과는 분명 다른 지점에 있는 캐릭터다. 혹시 그런 모습이 낯설게 느껴지진 않았나.

“지금껏 내가 연기해왔던 인물들의 표정과 얼굴은 익숙하다. 그런데 이번엔 한 번도 보여지지 않은, 나 스스로도 거울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그게 순간순간 낯설었다. 종찬에게 사납게 쏘아붙이듯 할 때의 그런 표정이라든지, 뭔가 안에서 치밀어 오르는데 억누르면서 하는 대사라든지, 친구와 대화를 할 때도, 형사를 찾아가서 다짜고짜 수사 일지를 내놓으라고 할 때도 이성을 잃은 듯한 행동들을 보여주는데 ‘미친 거 아냐’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낯설더라.”

▶오랜 기간 연기를 하다 보면 매너리즘에 빠질 때도 있을 텐데 그럴 때는 어떻게 극복하나.

“작게는 자주, 크게는 몇 번씩 매너리즘에 빠진다. 그러면서 내 얼굴이 지겹고 내가 하는 일이 지겨울 때가 있다. 최근 들어 그게 가장 고민스러웠다. ‘비밀은 없다’는 그 점에서 굉장히 새로웠고 앞으로 나에게 많은 영향을 미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신선한 자극으로 다가온 영화다.”

▶전작이 한·중합작 데뷔작인 ‘나쁜 놈은 죽는다’였다. 해보니 어떤가.

“한·중합작은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사실 전부터 출연 제의는 꾸준히 있었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한국영화는 기본적으로 감독, 배우, 스태프 등 영화에 대한 대략적인 메커니즘을 알고 있지만 중국은 전혀 모르는 세계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세팅이 되어 있지 않으면 되게 어려워질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한국에서 하는 일도 벅찬데 한·중합작까지 잘 해낼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한 번쯤은 경험해보고 싶었다. 나에게 새로운 기회로 작용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용기를 냈는데 결과적으로 하길 잘한 것 같다.”

▶이후의 계획은 뭔가.

“올 초에 ‘덕혜옹주’(8월 개봉) 촬영이 끝났는데 진짜 힘들었다. 그래서 당분간 휴식을 가질 생각이다. 완전히 가벼운 작품을 한다고 해도 에너지가 있어야 할 수 있으니까 나에겐 지금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다. 그래야 다음에 만날 때 더 좋은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다.”

글=윤용섭기자 yys@yeongnam.com

사진=CJ엔터테인먼트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위클리포유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