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홍 의사 옥중편지 원본 전체, 영남일보에 첫 공개

  • 박진관 최보규
  • |
  • 입력 2016-07-30   |  발행일 2016-07-30 제5면   |  수정 2016-07-30
獄中서 아내·자식·집안일 걱정 “일일이 생각할수록 근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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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홍 의사 옥중편지 全文 첫 공개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사건(1927)의 주인공 장진홍 의사(1895~1930)의 후손들이 장 의사의 옥중 편지 원본 전체를 영남일보에 처음 공개했다.


창여(滄旅) 장진홍 의사(1895~1930)의 옥중편지 원본 전체가 최초 공개됐다. 이는 장 의사가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사건’으로 감옥에 들어간 뒤 약 1년5개월간 자신의 지인에게 보낸 것들이다. 지금껏 유족들은 장 의사의 편지를 부분적으로만 공개해 왔다. 장진홍의사기념사업회가 펴낸 자료집에도 편지 일부(18점)만 담겨있다. 장 의사의 손자 상규옹(78)은 최근 영남일보에 장 의사의 옥중편지 원본 전체를 공개했다. 44점에 걸친 편지 전량을 언론에 공개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장 의사는 1920년대 후반 일제의 문화통치로 독립운동 기세가 약화되던 시대 상황 속에서 대담한 항일투쟁운동을 전개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대구·경북지역의 대표적인 독립투쟁가 중 한 명으로 꼽히기도 한다. 영남일보는 31일 장 의사의 순국 89주기를 맞아 그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고 앞으로 남은 과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1920년대 지역대표 독립운동가
 대구 조선銀 폭파사건으로 투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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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홍 의사의 손자 상규옹이 장 의사의 옥중편지를 읽고 있다. 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폭풍우에 집은 안 날아갔는지
 농사에 손해나 많지 않았는지”
“나의 장례는 간단하게 치르길”
 편지엔 자상한 가장모습 가득


 대구 복판서 일어난 거사 불구
 표지석·흉상 하나 안 남아 있어
 대구시는 보훈·기념사업 외면


◆창여 장진홍, 그는 누군가

1927년 10월18일 오전 11시20분쯤 한 남성이 조선은행 대구지점(현 대구시 중구 중앙대로 433)에 신문지로 포장된 벌꿀상자 4개를 들고 왔다. 그는 상자 하나를 직원에게 건네며 지점장에게 전달해 줄 것을 요청했다. 상자를 받은 직원은 안에서 풍겨오는 화약 냄새를 이상히 여겨 재빨리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 있던 건 불 붙은 다이너마이트. 불씨는 뇌관까지 불과 2㎝ 남아있었다. 겁에 질린 은행원은 들고 있던 상자의 도화선을 자르고 나머지 상자 3개를 건물 밖 주차장으로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자들이 연쇄적으로 폭발하면서 조선은행 일대는 혼란에 휩싸였다. 당시 은행원, 경찰 등이 파편에 맞아 중경상을 입었고, 은행 창문 70여개가 전파했다.

장진홍 의사는 바로 이 사건의 배후에 있었다. 그는 1895년 칠곡 인동면에서 태어나 20세가 되던 해 광복단에 가입해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독립운동 중 폭탄제조법을 배운 뒤 경북도청, 경북경찰부, 조선은행 대구지점, 식산은행 대구지점 등에 배달하기로 마음먹었다. 1920년대 후반 일제의 문화통치가 성과를 거두며 국내 항일운동의 열기가 점차 식어가던 때였다.

사건 후 도망 끝에 경찰에 붙잡힌 그는 대구지방법원 1심과 복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자 그 자리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불굴의 독립의지를 보였다. 사형 집행일 하루 전엔 일제에 의해 치욕적인 죽음을 당하느니 깨끗하게 죽겠다며 그간 모아온 수면제를 먹고 36세에 자결 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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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내용은?…독립운동가의 소소한 일상 엿볼 수 있어

유족들이 이번에 공개한 장 의사의 편지 전량은 모두 감옥에서 쓴 것이다. 그는 폭탄사건으로 1929년 2월14일 경찰에 붙잡힌 뒤 순국 전까지 약 1년5개월간 지인에게 40여통의 편지를 썼다. 한 달에 2.6통 정도 편지를 보낸 셈이다. 유족에 따르면 일부는 소실됐다.

편지는 장 의사의 소소한 일상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독립운동가의 결연한 모습보다는 가족의 안부를 묻거나 살림살이를 걱정하는 아버지, 남편, 형제로서의 면모가 돋보였다.

편지 중에는 ‘이번에 폭풍우로 인해 집이나 날아가지 아니하였으며, 농사에 손해나 많지 아니하였으며, 일일이 생각할수록 걱정이고 근심이다’ ‘볼일없이 자꾸 다니지 말고, 기차 타고 다닐 때는 더욱 조심하여라’ ‘부는 잘 지내고 있으니 조금도 걱정 말고 너의 어머니를 안심하도록 위로하여라’ 등 평범한 가장의 걱정거리가 담겨 있었다.

사형이 집행된 후의 일에 대해서도 자신보다는 가족들을 염려하는 모습이었다. ‘나의 장례에 쓸데없이 많은 돈을 낭비치 말고 20원가량만 가지고 간단하게 장례를 치르고 매장하여 주기 바라며…(중략)…집안 식구를 위해서도 나의 죽은 후의 낭비는 절대로 안되는 일’ 등이다.

유족들이 이번에 공개한 편지 역시 비슷한 맥락이었다.

장 의사는 자신의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일전에 면회하고 무사히 집에 갔는지 궁금하다…(중략)…아이들이 잘 지내기를 바라며 부탁할 것은 없으나 부디 아이들이 더럽고 누추한 말을 듣지 않도록 주의하기를 바라노라’고 썼다.

처음 공개된 아들에게 쓴 편지에는 ‘가령 나는 죽는다할지라도 너희들한테 별로 관계가 없으나 만약 너희가 병이 나든지 또 죽든지하면 집안도 망할 뿐만 아니라 너희 조모며 너희 육남매는 남의 눈의 가시가 된다’고 적었다.

장 의사의 옥중편지 곳곳에는 검게 칠해진 검열의 흔적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해 유족들은 “추측컨대 독립운동과 관련된 내용을 쓰면 편지를 찢어버리거나 검게 칠한 것 같다. 편지 내용 상당수가 일상 이야기일 수밖에 없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독립운동 역사 옆에 두고도 등한시…대구시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장진홍 의사의 옥중편지 전체가 공개된 가운데, 대구시가 장 의사의 독립운동 역사복원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장 의사가 주도한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사건’이 대구지역의 대표적인 항일운동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시 차원의 논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장 의사의 의거 발발 장소(대구시 중구 하나은행 대구기업금융센터) 일대에는 독립운동과 관련된 표지석 하나 남아있지 않다.

영남일보는 앞서 이곳에 장 의사의 흉상 건립(영남일보 2015년 4월17일 위클리포유 2면 보도)을 제안했지만 전혀 진행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하나은행 대구기업금융센터 앞 광장을 ‘장진홍 의사 광장’이라 부르자고 제안한 것도 진척된 바 없다.

이에 대해 대구시는 “장 의사는 대구시가 관리하는 애국지사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시 관계자는 “통상 주소지에 따라 애국지사를 관리한다. 장 의사는 경북 출생이기 때문에 대구시에 포함되지 않는다”며 “주소지가 다른 이에 대해 보훈·기념사업을 못하도록 규정된 건 아니지만, 진행하기 다소 어렵다”고 설명했다.

이같은 시의 입장에 대해 전문가들은 목소리를 높였다.

김희곤 경북독립운동기념관장은 “장진홍 의사의 의거활동은 대구 한복판에서 일어난 굉장한 거사다. 대구와 경북의 독립운동사는 떼놓고 생각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행정단위로 독립운동의 역사를 나누는 것은 졸렬한 생각”이라며 “장 의사의 표지석 및 흉상 설치는 25년 전부터 건의해 온 내용이다. 더 늦기 전에 대구시가 생각을 바꿔야 한다”고 비판했다.

장 의사의 손자 상규옹은 “과거 주요 기관들이 대구에 있었기 때문에 할아버지는 당연히 대구에서 의거활동을 했다. 마지막 소원은 대구에 할아버지 희생의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대구시, 시민, 시민단체가 할아버지의 의거활동에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전했다.

한편, 다른 지역은 장 의사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다양한 움직임을 보여왔다.

구미시는 2001년 11월 옥계동에 장 의사의 동상을 세운 뒤 2013년 7월 동락공원 내 ‘호국용사기림터’로 옮겼다. 칠곡군은 1953년 왜관읍에 장 의사의 기념비를 세워 그의 업적을 기려오고 있다.

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최보규기자 choi@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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