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가벼움과 무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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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4-17 08:32  |  수정 2017-04-17 08:32  |  발행일 2017-04-17 제23면
박정현 <설치미술 작가>
[문화산책] 가벼움과 무거움
박정현 <설치미술 작가>

어릴 적부터 밝아야만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장남에 대한 책임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막내로 태어나면 집안을 즐겁게 해야 하는 의무감 같은 게 생긴다. 막내로 태어난 나는 힘들 때는 감춰야 하고 즐거울 땐 몇 배나 더 즐겁게 보여야 했다. 투정만 부릴 것 같은 막내들은 집안의 ‘피에로’가 되어 힘든 일이 생기면 가족을 웃게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나는 감정을 속이며 웃는 법을 배워왔다.

난 미니멀한 작품을 좋아한다. 특히 2012년 과천 현대미술관에서 전시된 ‘한국의 단색화’ 작품을 특히 더 좋아한다. 밝지만 슬픔이 느껴지는 한국의 단색화 작품들, 그 속에는 색으로 덮어야만 했던 사연이 있는 것만 같았다. 무엇이 그토록 아름다운 색 뒤에 숨어있게만 했을까. 특히 1세대 단색 화가들은 가슴에 묻어야 했던 것을 캔버스 위에 감정을 감추듯 색으로 묻고 또 묻었던 것같이 보였다. 그들도 감정을 속이고 아무렇지 않은 척 밝아지는 법을 배워온 것일까.

단색화에 대한 그 어떤 평론가의 글과 분석도 제대로 읽어본 적 없고, 읽고 싶지도 않았다.

미술사적으로 아니면 이론적으로 대단한 작품이라고 평가가 되어 화려한 글이 적혀 있으면 마치 나와 같다고 생각했던 소박한 친구가 알고 보니 너무 대단해서 멀게만 느껴져 친구를 잃을 것만 같았고, 좋지 않은 글이 적혀 있다면 내 친구를 비난하는 것같이 느껴질 것 같아 화가 날 것만 같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만 존재할 것 같은 신뢰를 작품과 사람 사이에도 지키고 싶었다. 아직도 마음이 힘들 때면 단색화 작품을 떠올린다. 말 안 해도 내 마음을 알 것만 같은 오랜 친구를 떠올리듯.

작가들은 장남이 많을까 아니면 막내가 많을까. 경제적인 책임으로 장남들은 예술가의 길을 걷기가 쉽지 않았을 수 있지만 막내에겐 말이나 행동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 표현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 많았을 것만 같은 이유로 작업의 길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추측을 해보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한겨울, 창밖을 보다 나를 발견했다. 차가운 창문에 낀 성에에서 따뜻한 나의 호흡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금세 사라지고 만다. 사라지지 않는 호흡을 표현할 수 있을까. 호흡을 남기고 싶었다.

나의 호흡은 무겁다. 가벼운 호흡이 그립다. 가볍다는 것은 신중하지 못하다는 의미로 여겨왔지만 어떤 특정한 이념이나 생각의 억압을 받지 않는 자유로움이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가벼움이 좋다는 걸 왜 여태 알지 못하고 두려워했는지. 가벼움이 주는 즐거움을 왜 느끼지 못했는지. 내겐 이제 가벼움도 아름답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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