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칼럼] 저녁이 있는 삶

  • 인터넷뉴스팀
  • |
  • 입력 2017-04-19   |  발행일 2017-04-19 제30면   |  수정 2017-04-19
근로시간 단축만으로는 일자리 창출 등 불가능
차기 정부에서는 오히려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선…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수요칼럼] 저녁이 있는 삶
박정호 (변호사)

종편방송 중에 ‘한끼줍쇼’라는 예능프로그램이 있다. 출연자들이 무작정 남의 집 벨을 눌러 평범한 가정에 들어가 저녁 한 끼 얻어먹을 수 있을지 도전을 벌이는 내용인데, ‘저녁 밥상’을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담아내겠다는 것이 기획의도라고 한다. 그런데 지난 주말 방송된 가정은 무려 4대가 함께 사는 22명의 대가족. 아이와 어른들 소리가 뒤섞여 집안이 시끌벅적한 가운데 차려진 밥상에는 어른들이 즐기는 전통 밑반찬부터 아이들 입맛을 돋우는 현대식 인스턴트식품까지 다양했음은 물론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화목한 가족 분위기였다. 하루를 열심히 살고 해 질 무렵 집으로 돌아와 식구들이 밥상머리에 도란도란 둘러앉아 이런저런 이야기꽃을 피우며 식사하는 모습에 시청자들은 희미한 기억 저편을 떠올리기도 했을 것이고, 요즘같이 식구 귀한 집 어르신이라면 정말 많이 부러워했을 법하다. 이래서 밥상을 가정교육과 소통의 장이라고 하는구나. 특히 ‘저녁 밥상’을 열심히 하루를 살아가는 아비들에게는 삶의 원동력이자 목적이라 하는구나, 공감했을 것이다.

사실 오늘날 대한민국 여느 가정의 저녁 풍경은 대부분 위의 TV 속 대가족 같은 분위기가 아니다. 부모가 연장근로로 늦은 밤까지 회사에 발이 묶여 있는 사이, 아이들은 빼곡한 학원일정에 삼각김밥,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기 일쑤고, 애초에 가족이 저녁에 잘 만나지 못한다. 거기다 1인 가구까지 급증하면서 ‘혼밥’은 이미 하나의 트렌드가 된 지 오래다. 그래서 해 질 무렵 집에서 밥상을 차려놓고 가족이 둘러앉아 저녁밥을 먹는 모습. 그것은 어느새 동화 속 이야기처럼 현실에선 귀한 풍경이 되고 말았다. ‘식구(食口)’는 말 그대로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들을 말하는데, 가족이 식구로 살도록 그냥 내버려두질 않는 것이 요즘 세태라고나 할까.

그래서 그런지 이번 대선후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저녁이 있는 삶’을 외치고 있다. “주 52시간 노동시간을 준수하여 일자리 20만4천개를 창출하겠다” “연간 노동시간을 2천110시간에서 1천800시간으로 단축하겠다” “근로시간 단축을 위해 ‘칼퇴근’을 보장하고 연간 초과근로시간도 제한하겠다”는 등의 공약을 쏟아내고 있다. 달콤한 말이다. 귀에 훅 들어온다. 노동시간 세계 최장 수준의 나라 근로자라면 혹하지 않을 재간이 없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근로시간 단축만으로 정말 삶의 질이 향상되고 일자리가 창출될까. 나는 그럴 것으로 보지 않는다. 부끄럽지만, 한국의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2013년 기준 룩셈부르크나 노르웨이의 절반 미만 수준이다. 그래서 노동생산성 향상이나 임금 삭감 없는 근로시간 단축은 기업의 비용 증가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OECD 표준 근로시간을 지키고 있다는 대다수 대기업과 공기업이야 그 영향권 밖이라 하더라도, 그러잖아도 인력 부족 문제를 겪고 있는 중소 제조업체의 경우에는 당장 근로시간 단축으로 임금이 삭감되면 인력난은 더 심해져 사업은 위기에 봉착할 수밖에 없고, 결국 그나마 돌아가던 일자리마저 멈추어 줄어들게 될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하다.

생각건대, 차기 정부에서는 오히려 왜곡된 노동시장의 이중구조 청산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되지 않나 싶다. 여전히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가르고, 대기업 직원과 중소기업 직원을 나눈 가운데, ‘저녁이 있는 삶’은 대다수 근로자에게는 미사여구이고 공염불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대선주자들은 1차 노동시장 기득권 집단의 표심을 사기에 급급할 것이 아니라, 청년들이 중소기업을 찾고 중소기업은 일자리창출로 화답할 수 있는 노동개혁 방안에 좀 더 방점을 뒀으면 한다. 그래야 전체 고용의 75%를 차지하는 2차 노동시장에서도 희망을 품고 꿈을 꿀 수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박정호 (변호사)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오피니언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