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神, 천재들의 요람 선산 壯元坊Ⅱ .9] 장원방의 명문가 진양하씨(晉陽河氏)- <하> 충신 하위지의 두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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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1-06   |  발행일 2017-11-06 제13면   |  수정 2017-11-20
“범이 어찌 개를 낳겠는가”…하위지의 두 아들 죽음 앞에서도 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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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실록 4권, 세조 2년 6월8일 병오 두 번째 기사에는 세조가 단종 복위를 도모한 이들에게 처벌을 명하는 내용이 상세하게 나온다. 이때 하위지의 아들 중 호와 박 역시 화를 면치 못한다. 하지만 당시 호와 박은 죽음 앞에서도 기개가 남달랐다고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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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계하위지선생유허비(丹溪河緯地先生遺墟碑). 사육신 하위지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유허비로 장원방 일대인 구미시 선산읍 완전리 비봉산 자락에 있다. <영남일보 DB>

장원방의 최고 명문가인 진양하씨 집안은 사육신 하위지가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발각되어 멸문지화를 당하고 만다. 당시 세조는 친자식까지 연좌시켜 교수형에 처하고 어미와 딸, 처첩, 조손(祖孫), 그리고 형제자매와 아들의 처첩마저 변방고을의 노비로 전락시켰다. 16세 미만의 자식도 지방으로 내쳤다. 이 때문에 하위지의 아들 중 16세를 넘긴 장남 호(琥)와 차남 박(珀)은 화를 면치 못했다. 전설에 따르면 하위지의 두 아들은 충신의 자식답게 죽음 앞에서도 의연하고 기개가 남달랐다고 한다.

#1. 용서하지 않으리

“친자식들을 모조리 연좌시켜 교수형에 처하고, 어미와 딸, 처첩, 조손(祖孫), 형제자매와 아들의 처첩은 변방고을의 노비로 영속시키며, 16세 미만인 자는 나이가 찰 때까지 지방에 살게 하다가 멀리 안치시키라.”

1456년(세조 2) 6월8일, 세조의 살기등등한 어명에 편전에 엎드린 신하들은 더위를 느끼지 못했다. 이후 의금부(義禁府)에서는 어명에 따라 어찌 움직였는지, 앞으로 어찌할 것인지를 꼼꼼하게 보고하였다. 그 가운데 더위가 한층 더 깊어진 6월21일이었다.

“하위지, 이개, 성삼문, 박팽년 등 결당하여 역모를 꾀한 이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처분하였습니다. 우선 죄인들의 경우, 모든 문무백관을 군기감(軍器監, 병기의 제조 등을 관장한 관청) 앞길에 불러 모아 빙 둘러서게 한 다음, 거열(車裂, 죄인의 팔다리를 각각 수레에 묶고 수레를 반대 방향으로 끌어서 찢어 죽이는 형벌)하여 죽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이에게 두루 보인 후 그 목을 사흘 동안 걸어 본보기로 삼았습니다.”

현장에 없던 이들은 듣는 것만으로도 몸서리를 칠 일이었다. 음력 6월은 양력 8월이었다. 그 복더위에 사람의 목을 뙤약볕 아래 놓아둔 것이다. 그 참혹함이 보다 더할 수밖에 없었다.

“계속하라.”

“어미와 딸, 처와 첩, 조손, 형제자매, 아들의 처첩은 변방 고을의 노비로 삼았습니다. 또한 백부와 숙부, 형제의 자식은 먼 지방으로 안치하였습니다. 다만 그중에서 아직 16세가 되지 않은 자는 나이가 찰 때까지 일단은 외방에 두고 감시하도록 하였습니다. 더불어 친자식 중에 나이가 15세 이하인 자도 역시 외방에 두었다가, 나이가 되는 즉시 변방 고을의 관노로 삼게끔 하였습니다.”

세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비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형의 집행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약 석 달 뒤인 9월7일, 세조에게서 다른 명이 또 떨어졌다.

“죄인들과 관련된 부녀자 가운데, 하위지의 아내 귀금(貴今)과 딸 목금(木今)을 지병조사(知兵曹事) 권언(權)에게 주라.”

예조참판까지 지낸 사대부의 아내와 딸이 그저 그런 벼슬아치의 사적 소유물이 된 것이다. 세조의 보복은 거기서도 멈추지 않았다. 약 반년이 흐른 1457년(세조3) 3월23일에 하나가 더 보태졌다.

“선산에 있는 하위지의 전지(田地, 논밭)를 죽은 좌의정(左議政) 한확(韓確)에게 내려주라.”

그렇게 해서 세조는 자신을 거부했던 하위지 가문의 씨를 말렸다. 고고했던 한 집안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2. 범은 개를 낳지 않는다

하위지에게는 네 아들과 딸 하나가 있었다. 모두 영특하기도 했고 학문에 대한 열의도 높아 마을에서 기대하는 바가 자못 큰 아이들이었다. 장차 선산 영봉리(장원방)를 빛내줄 것이다, 영봉리가 기록으로 남는 데 공이 클 것이다 등등 희망과 소망을 등에 진 아이들이었다. 특히 장남 호(琥)는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진즉에 생원에 급제한 터였다. 차남 박(珀) 또한 형을 본보기 삼아 남다르게 애를 쓰고 있었다.


사육신 하위지 단종 복위 도모하다 발각
세조 “친자식까지 교수형에 처하라” 명해
어미·딸·처첩·형제자매마저 노비 전락

화 면치 못한 하위지의 두 아들 호와 박
어린 나이임에도 의연하게 받아들여
“어머님께 마지막 인사 고하게 해달라”
충신의 자식답게 기개가 남달랐다 전해



그날도 호와 박은 마을의 서당에서 공부에 열심을 내고 있었다. 그런데 밖이 소란스럽더니 형리들이 들이닥쳤다.

“하위지의 아들 호와 박이 누구냐.”

장남 호는 기어이 사달이 났음을 직감했다. 단종에 대한 아버지 하위지의 충심을 누구보다 잘 아는 호였다. 아직은 어리다고 자세히 알려준 적은 없었지만, 아버지가 단종의 복위를 위해 애를 쓰고 있다는 것쯤은 이미 눈치채고 있던 터였다. 호가 아우 박을 등 뒤에 세우고 담대히 나섰다.

“저희들입니다.”

그러자 무리 중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날카롭게 명령했다.

“묶어라.”

형리들이 달려들어 호와 박을 포승줄로 결박하기 시작했다.

“끌고 가라.”

등이 떠밀렸다. 자칫하면 짐승처럼 질질 끌려갈 것 같다는 생각에 호와 박은 온몸에 힘을 주고 당당히 걸어 나갔다. 서당 밖은 이미 구경 나온 사람들로 가득이었다. 표정마다 공포에 질려있었다. 걸어가는 호와 박의 뒤를 사람들이 따라갔다.

잠시 후 호와 박이 형장에 강제로 무릎 꿇려 앉혀졌다. 곧 수령이 나타났다.

“너희들의 아비 하위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호와 박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불충을 저질렀으니 마땅하다. 허니 죄인의 자식들인 너희들도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그러자 호가 차분한 목소리로 조용하면서도 담대하게 대답했다.

“어찌 살기를 바라겠습니까만, 한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들어주시겠습니까?”

내색하지 않았지만 수령은 탄복하던 중이었다. 웬만한 어른이라도 그만한 상황에선 오줌을 지릴 정도로 벌벌 떨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당당하게 소원까지 말하다니, 어린 나이임에도 기개가 남달랐다. 수령이 말했다.

“말해보라.”

“집에 계신 어머님께 작별 인사를 고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수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을 서당에서 끌고 온 것을 짐작하고 있던 터였다. 졸지에 끌려온 형제나, 끌려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형제의 어머니나, 그 속이 어떨 것인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수령은 때이른 죽음 앞에서도 어머니를 생각하는 형제의 갸륵한 마음이 장하면서도 측은했다.

“허락하겠다. 다녀오라.”

형제는 곧장 집으로 달려가 어머니 앞에 엎드렸다.

“소자들, 아버님의 뒤를 따라갑니다. 험한 시간이 어머님과 누이 앞에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부디 무너지지 마시고 만수무강하십시오.”

인사를 마친 형제는 사당으로 올라가 예를 갖추어 고한 후 형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아주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하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섰던 무리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범이 어찌 개를 낳겠는가.”

무참한 계절이 그렇게 지나갔다.

#3. 한 대로 받는 법

하위지가 온몸이 찢겨 죽고 12년이 흐른 1468년(세조 14) 가을이었다. 세자(훗날 예종)가 아버지 세조 대신 명했다.

“지난 사건에 연좌된 이들 가운데 16세가 되지 않아 죽이지 않고 지방에 살게 한 하위지의 조카 하포, 하분, 하귀동을 방면하라.”

하분(河汾)은 하위지의 형인 하강지(河綱地)의 아들이었고, 하포(河浦)와 하귀동(河龜同)은 하위지의 아우인 하기지(河紀地)의 아들이었다. 멸문을 당할 적에 16세가 되지 않아 살아남은 이들이었다.

“아울러 당시에 연좌된 이들, 무릇 200여명 또한 함께 방면하라.”

세자로서는 그럴 만했다. 위독한 아버지 세조를 위해 덕을 베풀어 심적 고통을 덜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실제로 세조는 즉위 이후가 평화롭지 못했다. 의욕적으로 꾸려간 국정과는 별개로 몸과 마음이 날로 쇠해졌다.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무릇 자신이 행한 만큼 받는 것이지.”

“그렇지. 그리 죽이고 또 죽였는데, 그 한이 달라붙어 숨이나 편히 쉴까.”

하지만 세자의 효심은 세조의 목숨을 늘리는 데 전혀 소용이 닿지 않았다. 이틀 후 세조는 결국 숨을 놓았다. 사후에도 세조는 평안을 누리지 못했다. 남의 자식들을 너무 많이 죽인 벌인지, 세조가 가장 총애한 자식 예종이 즉위한 지 고작 13개월 만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렇게 처절하기만 했던 한 시절이 저물었다.

그로부터 무려 237년이 지난 1705년(숙종 31) 12월6일이었다. 예조판서 민진후가 숙종에게 고했다.

“하위지가 옥중에 있을 때 조카 귀동의 이름을 ‘귀동’과 ‘곽()’ 자를 함께 써 집에 두게 하였다 합니다. 아들들이 모두 죽을 것이 분명한 터라 그를 후사로 삼을 뜻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집안에 닥친 화가 너무 처참한 탓에 감히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하위지의 아내가 자신의 친정에 맡겨 보살피도록 했다 합니다. 그러다 그 귀동이 성장해 이름을 곽 대신 원(源)으로 하고 하위지의 제사를 받들기 시작하긴 했는데, 공식적인 후계가 아니어서 자손이라 칭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전하께서 하원을 하위지의 후사라고 인정해주신다면 그 은혜가 한량없겠습니다.”

그러자 숙종이 일렀다.

“안타깝구나. 그대로 시행하라.”

이로써 하위지는 형제의 아들을 통해 대를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참고문헌=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조선왕조실록, 성리학의 본향 구미의 역사와 인물
▨도움말=박은호 전 구미문화원장
공동 기획 : 구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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