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성] 정화함대의 부활

  • 배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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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1-08   |  발행일 2017-11-08 제31면   |  수정 2017-11-08

중국 명나라 때의 환관 정화(鄭和)는 대항해가다. 1997년 미국 학술지 ‘라이프’가 뽑은 지난 1천년간의 위인 100인 중 14위에 올랐다. 윈난성 쿤양에서 이슬람교도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명나라 정복 과정에서 12세의 나이로 포로가 돼 거세된 후 환관의 길을 걸었다. 그의 성은 원래 마(馬)씨였으나 왕위를 찬탈한 영락제(永樂帝)를 도운 공로로 정씨 성을 하사받았다.

환관으로 승승장구한 정화는 영락제의 지시로 1405년부터 1433년까지 7차례에 걸쳐 대규모 선단을 이끌고 원정에 나선다. 28년간에 걸쳐 난징에서 아프리카 케냐의 몸바사까지 무려 37개국 18만5천㎞를 항해했다. 이를 입증하듯 최근 케냐의 만다섬에서는 당시 숨진 중국인 백골 3구와 영락제의 연호가 새겨진 동전이 발견되기도 했다. 정화함대는 규모면에서도 상상을 초월한다. 1405년 7월11일 1차 항해에 참가한 인원은 2만7천여명이었다. 함선은 기함 격인 보선(寶船) 62척을 포함해 240여척이나 동원됐다. 보선의 적재량도 1천500t에 달했다. 반면 정화함대보다 87년이나 늦게 항해에 나선 콜럼버스 선단은 50~100t급 범선 3척에 선원 120여명이 고작이었다.

세계를 누비던 무적함대의 영광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1424년 영락제 사망 이후 막대한 비용만 낭비한다는 비판에 밀려 원정은 중단되고 엄격한 해금(海禁)정책이 시행됐다. 배를 만들어 먼바다로 나가면 엄하게 처벌했고, 대형함선 설계도와 항해기록 등 관련 자료는 몽땅 불살랐다. 하지만 바다를 포기한 대가는 혹독했다. 왜구의 노략질은 물론 근대화가 늦어져 제국주의 열강에 유린당하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역사 속에 잠들어 있던 정화함대의 원대한 꿈이 지금 중국에서 다시 부활하고 있다. 자체 건조한 항공모함을 실전배치하고 남중국해 인공 섬에 군사시설을 설치하는 등 해양굴기에 속도를 내고 있다. 시진핑 주석의 일대일로(一帶一路) 전략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이달부터는 중국 정부 소속의 과학자들이 스리랑카와 공동으로 정화함대 난파선 탐사에도 나선다고 한다. 정화함대의 원정 역사를 남중국해 영유권 강화와 해양강국 도약의 추동력으로 활용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당연히 주변국의 불안감과 우려는 커질 수밖에 없다. 600년 전 정화함대는 서양과 달리 원주민을 대량 학살하거나 식민지로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주변국을 배려하고 갈등을 중재했다. 세계 패권을 노리는 중국이 교훈으로 삼았으면 한다. 배재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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