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칼럼] 팔은 짧고 손은 작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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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2-14   |  발행일 2017-12-14 제30면   |  수정 2017-12-14
잔액 210원 찾는 할아버지
두부찌개 못먹는 조손가정
우리이웃 고단한 삶들에게
신문·방송 속의 ‘억’소리가
로마제국 화폐처럼 낯설다
[여성칼럼] 팔은 짧고 손은 작아서
허창옥 수필가

마을금고에 들렀다. 볼일을 마치고 돌아서는데 할아버지 한 분이 통장을 주며 돈을 다 찾아달라고 한다. 후줄근한 차림에 굽은 등, 파뿌리가 된 머리칼, 치아가 없어서 오므라진 입이 아흔은 된 것 같다. 통장의 잔액을 읽은 나는 다시 확인한다. 210원, 그것이 할아버지가 ‘다 찾아달라’고 한 돈이다. 용지의 빈칸을 채우고 “할아버지, 도장 주세요” 말씀드렸다. 할아버지는 주름살 가득한 얼굴에 웃음을 띠면서 주머니를 뒤지더니 도장을 내 준다. “이 도장이 아닌데요, 할아버지” “그거, 할망구 거구나” 주머니에서 다른 도장을 또 내 준다.

직원에게 통장과 용지를 건넨다. “할아버지 여기 앉으셔서 기다리세요” 말씀드리고 마을금고를 나온다. 210원을 받아드는 할아버지를 뵙기가 민망할 것 같아서다. 솔직하게 말하면 그 모습을 뵙고 싶지 않아서다. 생각 몇 갈래가 얽힌다. 할아버지는 잔액을 알고 계실까. 왜 다 찾겠다고 한 것일까. 그 돈이 지금 필요한 걸까. 혹시 당신의 삶을 정리하는 것은 아닐까. 어떤 경우라 할지라도 추운 날씨에 그리도 허술한 차림으로 나설 일은 아닌 것 같다.

한 모자가정 이야기가 방송되고 있다. 모자가정이라 하지만 어머니와 아이들이 사는 집이 아니다.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는 생활고를 못 이겨 집을 나갔다. 열두 살과 아홉 살 남매를 키우는 할머니의 이야기다. 이렇게 살기 시작한지 다섯 해째가 된다고 한다. 이 가족은 저소득층 모자가정에 주어지는 약간의 쌀과 생계지원비로 생활하고 있다. 후미진 골목의 좁은 방, 서랍장 하나와 그 위에 개켜져 있는 이불, 낡은 텔레비전, 잡동사니들이 궁색한 살림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세 식구가 둥근 밥상을 가운데 놓고 저녁밥을 먹고 있다. 김치찌개와 된장이 오늘의 저녁반찬이다. “아이들이 두부찌개를 좋아하는데 자주 해 먹이지 못해요.” 할머니가 이것저것 질문을 하는 리포터에게 한 말이다. 맛있는 음식을 맘대로 먹이지 못하는 할머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두 아이는 밝은 얼굴로 밥을 먹는다. 두부찌개라! 김이 모락모락 나는 즉석 두부 한 모를 사면 뜨끈뜨끈한 두부찌개를 세 식구가 두 끼는 맛있게 먹을 수 있을 텐데.

돈은 신문의 활자로 혹은 앵커의 입에서 나오는 공허한 소리로 그 모습을 나타낸다. 몇 백억, 몇 천억이란 숫자로 우리의 눈을 홉뜨게 하다가 때로는 몇 조로 몸을 불려서 그 크기를 짐작도 못하게 한다. 로마제국의 화폐나 옛 러시아의 화폐처럼 그 단위가 낯설다. 우리의 돈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일까. 돈은 활자가 된 채 죽어버렸는지 보이지 않는다. 소리가 되어 사라져버렸는지 만져볼 수도 없다. 어디에서 보았노라고, 누군가가 검게 물든 그것을 만지더라고 소문만 무성하다. 그리고 그 소문조차도 곧 사라져버린다. 돈은 대체 다 어디로 갔을까. 도무지 쓸데없는 생각들이 꼬리를 무는 겨울밤 문득 얼마 전에 읽은 박노해의 시를 떠올린다.

“문풍지 우는 겨울밤이면/ 윗목 물그릇에 살얼음이 어는데/ 할머니는 이불 속에서/ 어린 나를 품어 안고/ 몇 번이고 혼잣말로 중얼거리시네/ 오늘밤 장거리의 거지들은 괜찮을랑가/ … / 뒷산에 노루 토끼들은 굶어죽지 않을랑가 / … /아, 나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낭송을 들으며 잠이 들곤 했었네/ (후략)” (‘그 겨울의 시’ 중에서)

세찬 바람이 창문을 두드리는 밤, 이불이 얇은 누군가를 생각한다. 그러면서 이불을 끌어당겨 몸을 묻는다. 따뜻하고 배부르다. 지금 배가 고프고 이불이 얇은 누군가는 관념 속에서만 존재한다. 걱정은 다만 조금 남아 있는 양심과 사회적 부채감 때문에 하는 것이다. 시 속의 할머니처럼 노루 토끼까지는 어림도 없다. 팔은 짧고 손은 작아서 이웃에도 가 닿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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