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옥의 그림 같은 집] 문이 있는 집과 문이 없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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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6-28   |  발행일 2019-06-28 제40면   |  수정 2019-06-28
피카소 입체파 가담…문이 없어 답답한 집이 아닌 큐브 단위로 분석·해체
[서영옥의 그림 같은 집] 문이 있는 집과 문이 없는 집
브라크의 ‘에스타크의 집들’. 1908년 작.
[서영옥의 그림 같은 집] 문이 있는 집과 문이 없는 집

“아주 먼 옛날이었다. 골 깊은 산중에 오두막이 하나 있었지. 엄마와 오누이가 함께 사는 작은 집이었다. 이들은 엄마가 이웃 마을에서 일을 하고 받은 품삯으로 생계를 유지했어. 엄마가 일하러 가면 오두막엔 어린 오누이만 남곤 했지.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건넛 마을 잔칫집 일을 돕고 오두막으로 돌아오던 엄마 앞에 호랑이가 나타났단다….”

짐작했지 싶다. 한국인이면 한번쯤 들어보았을 전래동화 ‘해님 달님’(日月說話)의 일부분이다. 오두막에서 엄마가 오기만을 기다리던 오누이가 호랑이를 피해 동아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달순이, 별순이가 되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외할머니는 반복해서 들려주곤 했다. 이 이야기에 겹쳐지는 마녀가 있다. 바로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착한 마녀 글린다이다.

엄마를 잡아먹은 호랑이가 남매까지 해치려고 오두막으로 갔을 땐 글린다가 오두막의 모든 문들을 마법으로 감쪽같이 가려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호랑이의 발길을 돌리게 할 유일한 방법이 오두막의 문들을 꽁꽁 숨기는 것이라니. 난관을 극복할 지혜를 구하기보다 남매를 보호할 증강현실을 구현하고 싶었던 순진한 발상에 웃음짓곤 한다. 실은 지난 수업시간에 본 ‘에스타크의 집들’이 외할머니가 들려준 달순이, 별순이의 오두막을 생각나게 했다.

‘에스타크의 집들’은 화가 조르주 브라크가 그린 집이다. 입방체의 이 집들에는 문이 하나도 없다. 서양미술사에 단골메뉴처럼 등장하는 ‘에스타크의 집들’을 학생들에게 보여줄 때마다 답답하다는 반응이다. 집에 당연히 있어야 할 문이 없기 때문이다. 집에 문을 그리지 않은 것은 잘못 표현한 그림으로 치부될 만하다. 완벽함을 추구했던 고전주의적인 시각으로 볼 때 더욱 그렇다. 브라크는 왜 비난을 무릅쓰면서까지 문을 그리지 않은 것일까.

브라크는 1906년부터 1908년까지 여름이면 프랑스로 달려갔다. 프랑스 남부의 작은 도시 에스타크에 머물기 위해서다. 에스타크 지방은 1870년대에 세잔이 정착하여 많은 대작을 남긴 곳이기도 하다. 여름 내 에스타크에서 작품 활동을 한 브라크는 세잔의 예술세계를 동경했다. 1907년에 연 ‘세잔 회고전’에서 감동을 받은 후부터다. 아시다시피 19세기 후기인상파 화가인 세잔은 자연을 구, 원뿔, 원기둥으로 환원한 화가로 회자된다. 브라크는 사물의 본질을 이성적으로 탐구하고 분해하여 재구성한 세잔의 자세를 존경했다.

세잔은 화가의 감정을 냉정하게 배제시킨 작업을 한 화가다. 불변하는 사물의 형태를 그리기 위해 색채분할법을 적용했고, 색을 이루는 많은 조각들을 수없이 계산된 부분으로 나누어 입체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전통적인 명암법도 포기했다. 인위적인 명암의 적용은 사물의 고유한 입체감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문이 생략된 ‘에스타크의 집들’은 브라크가 세잔의 그림을 연구한 후에 그린 그림이다.

브라크는 피카소와 동행했다. 브라크가 피카소의 화실을 방문하여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감상한 후였다. 새로운 회화의 길 모색에 토대가 된 ‘아비뇽의 아가씨들’은 브라크가 피카소와 함께 큐비즘(입체파)의 조형혁명을 도모하는 데 발판이 된 그림인 셈이다. 단서를 제공한 세잔 덕분에 브라크는 입체파를 연구할 수 있었다. 입체파를 본격적으로 실천하고 명성을 얻은 피카소와 함께 입체파에 가담했던 브라크의 ‘에스타크의 집들’은 이런 환경에서 탄생한 그림이다.

1908년 국전(살롱)에서 엄청난 비난을 받았던 ‘에스타크의 집들’은 큐비즘이란 말을 낳았지만 “작은 큐브들을 그려놓았다”고 한 비아냥을 견뎌야 했다. ‘에스타크의 집들’을 단순히 문이 없어 답답한 집이 아닌 사물을 큐브 단위로 분석하고 해체하여 그린 집임을 알고 보면 인식은 달라진다. ‘에스타크의 집들’을 잘못 표현한 그림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이유이다.

문을 생략한 ‘에스타크의 집들’처럼 미술사에는 자세히 알고 보면 이해되는 작품들이 많다. 과거의 잣대를 들이대면 엉뚱한 결과와 마주하게 되는 작품도 상당수다. 형식만으로 판단할 수 없는 작품도 무수하다. 작은 느낌에 많은 정보가 담겨있는 것과 같은 논리의 작품도 여럿 된다.

삶의 범주는 미술작품이 담아낸 세상보다 훨씬 더 넓다. “이름을 알고 나면 이웃이 되고, 색깔을 알고 나면 친구가 되고, 모양을 알고 나면 연인이 된다….”(‘풀꽃2’, 나태주)고 한 시처럼 다양한 사연에 귀 기울일 때 삶은 더 이해받고 풍요로워질 것이다. 화가·미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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