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학동 IT 창조마을 ‘기가 서당’ 변화…훈장·도시아이들 화상통화 예절 교육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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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9-27   |  발행일 2019-09-27 제35면   |  수정 2019-09-27
■ 개천절 특집 한민족 얼을 지키는 사람들
청학동청소년수련원 서흥석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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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와 과거, 그리고 미래의 청학동 모습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원 청학동 마을 모습. 아직 많은 집들이 짚으로 지붕을 엮고 있어 언뜻 사극세트장을 연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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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학동서당 현판(위). 상업적 목적의 외래 서당의 범람과 서당교육에서 일반 의무교육으로 돌아선 아이들 때문에 그 기능을 거의 잃어버린 전통서당의 현재 모습.

◆단군성전 그 우여곡절사

1920년대 일제는 서울 남산에 있던 국사당(國師堂)을 인왕산으로 옮겨버린다. 조선 왕조를 창건한 태조 이성계가 세운 국사당이었다. 조선의 큰 자리가 망가진 셈이다. 백성들이 그 자리에 단군이라도 모시게 해 달라고 했지만 거절됐다. 심지어 단군성지인 강화도 마니산의 우물까지 막아버렸다. 일제는 국사당 자리에 일본 정신을 상징하는 ‘조선신궁’을 건립한다.

광복후 서울에 두 개의 단군 성지가 등장한다. 바로 57년 세워진 ‘단군굴’, 그리고 68년 문을 연 ‘단군성전’이다. ‘지하단군전’으로 불리는 단군굴(檀君窟)은 57년 서울 남산에 건립된다. 공로자는 바로 함경남도 신흥에서 태어난 박효달. 그는 1943년부터 일제의 눈을 피해 집 벽장 속에 단군을 모셨고 이후 국민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양해야 된다고 여겨 남산식물원 순환도로변에 단군굴을 세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2006년 단군굴은 철거된다. 국유지에 들어선 탓이다. 현재는 단군굴 표석만 남아 있다.

서울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1번 출구에서 10분 거리에는 단군성전이 있다. 사직단 바로 뒤에 있지만 상당수 국민은 잘 모른다. 그 지척에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를 모시는 천도교 수운회관이 있을 만큼 민족정기가 어린 곳이다. 숨은 공로자가 바로 이숙봉 여사(1917~1996)다. 이 여사는 부친 이한철옹의 뜻을 받아 충남 천안시 북면 오곡리에서 단군제사를 숨어서 지냈다. 광복 직후 일제에 의해 훼손된 남산에 단군제단을 설치했으나 6·25전쟁으로 여의치 않았다. 이에 숙봉·정봉·희수 세 자매가 주축이 돼 재차 성전을 건립한다. 현재는 이 여사의 아들인 이건봉 사무총장이 상주하고 있다. 매년 3월15일 단군이 승하한 어천절과 10월3일 개천절에 제례를 올린다. 땅은 문화재청 소유이고 시설문은 종로구청 공원시설물이다. 비영리법인인 현정회가 서울 종로구로부터 수탁관리하고 있다. 77년 신상균이 조각한 국민경모 단군상을 봉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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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흥석 청학동청소년수련원 이사장은 물질만능주의가 만연된 현대 도시아이들을 위해 무엇보다 자신을 극복하고 예의범절을 잘 지키는 게 중요하다는 걸 강조하고자 ‘극기복례’란 휘호를 즐겨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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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년전 마을 주민이 공동으로 설립한 청학동청소년수련원 이사장직을 맡아 두 동생과 함께 청학동 예절문화를 도시인들에게 전파하고 있는 서흥석 이사장.


지리산 동쪽기슭 청학동 별칭은 도인촌
반세기 동안 외지 자본에 잠식돼 특수
한창때 훈장 30여명, 상업시설도 몰려

특정 세거지 아닌 13개 姓氏 모여 거주
초가집 10여채 남짓 윗동네 원 청학동
사극에 출연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아랫동네가 신문물 들어온 신 청학동

주민 공동출자로 건립한 청소년수련원
서흥석 이사장과 두 동생이 공동 운영
농업만으로 살기엔 한계, 현대화 주도
다랭이논에 상가 만들고 뉴버전 변신


◆청학동 훈장을 찾아서

나는 삼성궁을 떠나 이 시대 마지막 훈장문화를 전승하고 있는 청학동 훈장을 만나러 차를 몰았다. 지리산 동쪽 기슭에 위치한 청학동의 별칭은 ‘도인촌(道人村)’,

선구영부천하승지(仙區靈符天下勝地). ‘무릉도원 같은 신선들이 사는 천하의 명승지’라는 입석이 도인촌 입구에 세워져 있다. 그리고 삼성궁과 갈라지는 분기점에 최근 세운 일주문 같은 ‘지리산 청학동’이란 현판이 걸린 전각이 세워져 있다. 거기서부터 3㎞ 청학동 구간이 이어진다. 대나무숲이 도로를 빼곡하게 차지하고 있었다. 왠지 청학이 저 대숲에서 날아오를 것 같았다.

반세기 동안 청학동은 외지 자본에 의해 많이 잠식돼 있었다. 청학동 특수를 누린 상업자본이 지난 30여년 청학동을 많이 피곤하게 만든 것도 사실이다. 일부는 유명 방송인으로 변신한 김봉곤이 훈장의 대명사로 대서특필되는 것도 불편해 한다. 최근 한 청학동 훈장이 서울의 모처에서 자동차 접촉사고 관련 주민과 시비를 빚는 바람에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 뉴스로 인해 청학동 전체가 깡그리 욕을 먹었다. 청학동에 사업을 하러 들어온 이런저런 훈장이 많을 뿐만 아니라 그 언저리에 살기만 해도 훈장으로 부풀려지는 세태가 만든 해프닝이랄 수 있다. 청학동 측은 관계요로에 해명서를 돌려 겨우 사태를 수습할 수 있었다.

청학동으로 가는 도로 변에 이런저런 시설들이 많이 들어섰다. 펜션, 식당, 예절학교 및 서당, 숙박을 위한 산장과 민박집, 카페 등 30여 업소가 뒤엉켜 있었다. 한창 때 청학동 훈장만 30여명이 존재했다. 지금은 지리산 특수가 많이 수그러졌다. 그래서 성수기가 아닐 때 오면 다소 썰렁한 기분이 감돈다.

1980년대말 한 TV를 통해 한국야쿠르트 장수마을 CF에 나오면서 청학동은 전국적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이때 청학동 주민들이 모델로 출연하였다. 주민들은 갓을 쓴 선비의 모습을 하였고 댕기머리를 한 학동들이 등장했다. 이 CF로 청학동이 인기를 얻게 되자 청학동에서 상경한 학생을 주인공으로 한 어린이 드라마 ‘댕기동자’가 방영되기도 했다. 단군 전문가들에 따르면 댕기는 초대 단군왕검을 추모해 받든 조기의 변형이라 한다.

◆현대가 청학동을 만났을 때

선한 웃음이 인상적인 훤칠한 키의 서흥석 청학동청소년수련원 이사장(63)이 마중을 나왔다. 그는 안팎이 모두 청학동 사람이다. 평생 밖으로 출타한 건 손으로 꼽을 정도로 적다. 아직 상투를 틀고 산다. 마을의 대소사 때 조선시대 질감이 그대로 살아나는 수제 갓을 착용한다. 하지만 글공부로만 살 수 없어 지금은 현대적으로 살아간다. 선인도 시대를 따라야 하는 모양이다.

청학동은 특정 성씨의 세거지가 아니다. 한말, 그리고 좌우익 갈등기 어수선한 정국을 벗어나 1950년대 집단이주식으로 이상향 같은 청학동으로 거처를 옮긴 여러 성씨가 함께 만든 신앙촌 같은 곳이다. 한말 붐이 일어난 재난을 피할 수 있는 정감록이 찍어준 ‘십승지(十勝地)’와 비슷한 공간이다.

지리산 청학동이 문헌에 등장한 것은 고려 중기의 문인인 이인로의 ‘파한집(破閑集)’. 또한 16세기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조여적이 지은 ‘청학집’은 상고사를 복원하고 오늘의 한국인에게 선도 또는 신교를 선사하였다.

조사해 보니 무려 13개 성씨가 모여 살고 있었다. 청학동 주민들은 전남 순천군 구림면 출신인 강대성(姜大成, 1898~1954)이 개창한 ‘유불선갱정유도교(儒佛仙更定儒道敎)’라는 신흥종교를 믿고 있다. 그 정식 명칭은 ‘시운기화 유불선동서학 합일대도 대명다경 대길유도 갱정교화일심(時運氣和儒佛仙東西學合一大道大明多慶大吉儒道更定敎化一心)’. 단군교의 일파로 일명 ‘일심교’로도 불린다. 남원에 본부를 두고 청학동은 수련소 구실을 한다.

◆원 청학동을 찾아서

청학동은 윗 동네와 아랫 동네로 나눠진다. 윗동네는 원 청학동, 아랫 동네는 신문물을 품고 있는 신 청학동이다. 35년전 처음 전기가 들어온다. 하루에 두 번 버스가 들어온 오지였다. 민박 시설도 없었다. 막차의 기사들은 청학동에서 자고 아침 7시 하동으로 출발했다. 요즘 두 동네 사이를 잇는 도로 확충공사가 진행 중이다.

나는 원 청학동부터 먼저 살펴봤다. 10여채 남짓한 집은 모두 초가 버전이었다. 식당도 두 곳이 있다. 주민들도 머리카락을 그대로 노출하지 않고 두건 같은 모자를 착용한다. 사극에 출연한 사내들 같다. 지붕에는 TV 수신기가 꽂혀 있다. 그러면서도 유불선과 비견되는 경전의 주요 문구를 붓글씨로 적어 주련 등으로 걸어놓았다. 고풍과 신풍이 공존하고 있다.

청학동 훈장 역시 세월의 흐름을 비켜나갈 수 없었다. 1950~70년대는 마을 치성소 같은 천제궁 바로 옆에 청학동 전통서당이 하나 있었다. 태어난 자녀는 여기서 교육을 받았다. 사자소학, 천자문, 동몽선습, 명심보감, 소학, 사서삼경 등을 배웠다. 그걸 숙지하려면 족히 30년은 걸렸다. 그래야 훈장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초창기 어른들은 세상과 담을 쌓았다. 기존 의무교육도 거부했다. 초창기에는 그 원칙이 먹혔다. 나중에는 의무교육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청학동은 하동교육청 관할이다. 아이들은 근처 묵계초등을 나와 청암중에 입학한다. 지리산 빨치산 시절에는 토벌군에 의해 잠시 마을을 비우기도 했다.

13년전 마을의 미래를 위해 서당을 겸한 <사>청학동청소년수련원이 들어선다. 마을 주민 20명이 공동출자 했다. 하지만 제대로 꾸려가질 못했다. 그래서 서흥석 이사장과 두 동생이 함께 공동운영하기로 맘을 먹는다. 자연스럽게 기존 전통 서당은 폐쇄된다. 지금 그 마루에는 서예 연습한 한지가 수북하게 쌓여 있다.

대신 도시의 아이들이 되레 서당교육을 받으러 입교한다. 글공부가 아니라 예절과 인성교육이 목적이다. 서 이사장의 딸도 진주여고, 아들은 부산으로 가서 교육을 받았다.

지금은 상주하면서 가르칠 수 있는 훈장을 찾기 어렵다. 그래서 초빙 형식으로 모셔온다. 서계룡, 이학규, 정병호, 김덕준 등 15명 정도가 거쳐갔다. 보통 4~5년 머물다 간다. 지금은 대전에 사는 한학자 김인철씨가 10여년간 훈장을 맡고 있다.

2013년 청학동의 랜드마크 구실을 하는 천제궁이 중수를 한다. 그때 비석에 새겨진 청학동 주민은 모두 72명. 아버지 세대와 아들 세대는 점점 멀어지고 있다. 하지만 청학동 아이라서 언젠가는 청학동 정신으로 돌아올 것이라 믿는다.

1998년은 청학동이 올드 버전에서 뉴 버전으로 변신을 하는 순간이었다. 서 이사장이 주도적으로 현재 청학동 주차장 청학동마을회관 맞은편에서 자연식당이 오픈한 것이다. 지금은 민박도 겸한다. 그는 당시 큰맘을 먹는다. 반목과 질시도 있었지만 다랭이논을 다져 새로운 상가를 차렸다. 더 이상 농업으로 살기 어렵다는 걸 절감했다. 그가 제일 먼저 청학동 현대화를 주도한 셈이다. 그 사이 마을은 상전벽해, 정보화마을 인프라도 들어섰다. KT는 2015년 청학동에서 기가 인프라와 지역 맞춤형 IT 솔루션을 적용한 ‘청학동 기가 창조마을’ 구축을 선포한다. 훈장도 인터넷으로 도시 아이와 화상통화가 가능하게 됐다. 지금 근처에 성남, 해원, 청매향, 계곡 등 여러 식당이 운집해 있다. 다들 신선주를 팔고 있는 게 흥미롭다. 청소년수련원은 여름·겨울방학 때 중학생까지만 받는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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