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역사 청송 문화재 여행 .16] 금대정사와 방호정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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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0-29   |  발행일 2019-10-29 제13면   |  수정 2019-10-29
임란·병란 격변기 조준도 5형제의 충효정신 오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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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조씨 4부자의 재실인 금대정사.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양쪽에 1칸씩의 온돌방이 있다. 1993년 2월 경북도유형문화재 제277호로 지정됐다. 금대정사는 산을 등진 높은 대 위에 동남향으로 올라 있는데 정면 4칸, 측면 2칸에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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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덕면 신성리 신성계곡 절벽 위에 올라앉은 방호정과 주변 전경이 한 폭의 수묵화처럼 느껴진다. 방호 조준도는 어머니 권씨가 세상을 떠나자 그 묘소가 바라보이는 이곳에 정자를 지었다.

다섯 형제가 있었다. 저마다의 학문과 무예, 효와 충으로 원근의 존경을 받았던 그들은 조선의 산하가 가장 피폐했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시대를 온몸으로 살았다. 가계 계승을 위한 양자제도가 흔했던 조선시대, 형제들은 어린 시절을 모두 함께 보내지는 못했지만 우애는 각별했다. 임진왜란 초기 큰형이 일찍 세상을 떠났고, 이후 차례로 부모를 여읜 뒤 남은 네 형제의 정은 더욱 애틋했다. 그들은 서로 가까이 살며 먼저 떠나간 이들을 위해 함께 울었고 일생 배움과 나눔을 게을리 하지 않아 세상의 칭송을 받았다. 형제들은 함안조씨 수도(守道), 형도(亨道), 순도(純道), 준도(遵道), 동도(東道)다.

◆금대정사
조수도·함수-조동도·함신 父子 배향 재실
고종 때 서원 철폐령으로 묘우 外 훼철
산을 등진 높은 대 위에 홑처마 팔작지붕
1993년 경북도 유형문화재 277호 지정

◆방호정
금대 아래 계곡 벼랑 위 넷째 조준도 정자
ㄱ’자형…전면 팔작지붕·측면 맞배지붕
모친 별세하자 묘소 바라보기 위해 건립
1984년 경북도 민속문화재 51호 지정


#1. 다섯 형제들

장자인 조수도는 자는 경직(景直), 호는 신당(新堂)이다. 1565년에 태어나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김언기는 그에 대해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고 이미 학문을 성취한 사람’이라고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두 동생 형도와 동도를 곽재우 의병부대로 보내고 가문을 피란시킨 후 28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둘째 조형도는 자는 대이(大而), 호는 동계(東溪)다. 그는 1567년 청송 안덕에서 태어나 어릴 때 백부의 양자가 되었고 한강 정구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임진왜란 때는 의병으로 참여해 공을 세웠으며 무과에 급제해 무인의 삶을 살았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그의 나이는 70세였다. 노령에도 남한산성으로의 진격을 도모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고 청나라와의 화의에 분개한 나머지 등창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셋째 조순도는 자는 경일(景一), 호는 남포(南浦)다. 그는 1573년 태어나 평생 부모를 모시며 효로써 충을 행하며 살았다. 임진왜란 당시 후방에서 부모를 모셨던 그는 밤잠을 이루지 못한 채 매일 전장으로 격려의 글을 보내 사기를 진작시켰으며 전략을 세워 ‘자리에 앉은 지휘관(座元帥)’이라 불렸다. 여러 차례 천거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만년에는 후학을 가르치다 1653년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넷째인 조준도는 자는 경행(景行), 호는 방호(方壺)다. 그는 1576년 태어나 6세 때 재종숙부인 사직공(司直公) 조개(趙介)에게 입양됐다. 어려서부터 지덕(智德)이 뛰어났던 그는 사직공이 매우 기이하게 여길 만큼 재능이 비범했다고 전한다. 10세 때에는 큰형 조수도를 따라 유일재 김언기에게 수학하며 퇴계학을 계승했다. 김언기의 70여 문하생 가운데 그는 가장 어렸지만 스승은 그의 의젓함과 총명함을 특별히 아꼈고 그의 재주와 기량을 소중히 여겼다고 한다. 조준도가 13세 되던 해 양아버지인 사직공이 세상을 떠나자 그는 성인과 마찬가지로 상을 치렀다. 그는 형 조형도가 고향에 올 때마다 항상 주위에서 받들고 보좌하며 책상을 나란히 하여 함께 공부했는데, 그에게 그것은 모든 근심을 잊게 하는 즐거움이었다고 한다. 조준도는 병자호란 이후 자신의 정자에 파묻혀 지내다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다섯째인 조동도는 경망(景望), 호는 지악(芝嶽)이다. 그는 1578년에 태어나 15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둘째 형인 동계 조형도와 함께 의병으로 나섰다. 정유재란 때는 향의장(鄕義將)으로 활약했던 그는 ‘도를 닦을 때는 경망에게 의지하라’는 글을 얻었을 만큼 사람들에게 신망이 높았다. 전쟁 후에는 포상을 거절하고 형들과 함께 자연에 묻혀 학문을 익히고 후학을 양성하다 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망운 조지는 생육신 어계(漁溪) 조려(趙旅)의 후손으로 1562년 청송 안덕에 터를 잡았다. 그는 아들들에게 근검과 군자의 몸가짐을 가르치며 충효와 학문을 가문의 업으로 삼을 것을 강조했다. 그는 1599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묘소는 안덕 덕성리로 추정된다.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 권회(權恢)의 딸이다. 그녀는 1619년 경 세상을 떠나 신성리 금대(金臺)에 묻혔다.

안덕면 명당리에는 망운 조지의 정자인 망운정이 있다. 그 바로 옆에는 셋째아들인 조순도의 정자 남포정이 자리한다. 큰형이 일찍 세상을 떠난 후 그는 평생 부모를 모셨다. 이웃한 현동면 인지리에는 조수도를 기려 세운 ‘추모정’이 있고 안덕의 덕성리에는 조형도의 정자인 동계정이 있다. 금대에는 막내인 조동도의 정자 지악정이 있고, 금대 아래에는 넷째 조준도의 정자 방호정이 있다. 그리고 다섯 형제가 모두 세상을 떠난 뒤 금대에 재사가 건립되었다. 금대정사(金臺精舍)다.

#2.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277호 금대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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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대정사 편액.

금대정사는 조수도와 그의 아들 조함수(趙咸遂), 조동도와 그의 아들 조함신(趙咸新)을 기리는 재실로 영조 12년인 1736년에 건립되었다. 재사는 산을 등진 높은 대 위에 동남향으로 올라 있는데 정면 4칸, 측면 2칸에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중간의 2칸은 전면이 개방된 대청이고 좌우에는 통간 온돌방을 배치했다. 자연석을 주춧돌로 놓았고 전면에만 두리기둥을 세웠다. 금대정사에는 ‘금대(金臺)’와 ‘사암(思庵)’ 두 개의 편액이 걸려 있다.

헌종 13년인 1847년에는 조지와 조동도 부자를 위한 묘우와 강당, 동재, 서재, 문루 등을 건립했다. 그러나 고종 5년인 1868년 서원 철폐령으로 묘우를 제외한 나머지 건물들은 모두 훼철되었다. 그리고 남아 있는 묘우를 개조한 것이 금대정사의 동쪽에 있는 우모정(寓慕亭)이다. 우모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맞배지붕 건물로 근래에 수리를 한 모습이다.

금대정사의 서쪽에는 지악정(芝嶽亭)이 있다. 지악정은 조동도가 지은 정자로 1624년에 건립한 것이다. 처음 지어졌을 때는 아주 소규모였다고 한다. 현재는 정면 4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 건물로 1962년에 확장 중수했다.

금대정사 앞 낮은 마당에는 동재와 서재, 대문간채 등이 튼 ‘ㅁ’자 형을 이루고 있다. 현재 금대정사에는 아버지 망운 조지와 큰아들 수도, 막내아들 동도 등이 함께 모셔져 있다. 금대정사는 1993년 2월25일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277호로 지정되어 보호 및 관리되고 있다.

#3. 경북도 민속문화재 제51호 방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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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호정 편액.

금대 아래 계곡의 벼랑 위에 조준도의 정자 방호정(方壺亭)이 위치한다. 조준도는 친어머니 권씨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 묘소가 바라보이는 곳에 방호정을 지었다.

‘방호’는 바다 가운데 신선이 산다는 산 또는 섬 중의 하나다. 건물의 평면은 ‘ㄱ’자형으로 절벽 쪽의 전면은 팔작지붕이고 측면은 맞배지붕이다. 전면에는 마루방 두 칸과 온돌방 한 칸, 측면은 부엌과 한 칸 온돌방이 있다. 자연석 기단과 주춧돌 위에 네모기둥을 세웠으며, 전면 마루방에는 하부에 2단으로 궁창널을 끼운 세살 쌍여닫이문을 달았다.

방호 조준도는 정자를 짓고 ‘풍수당(風樹堂)’ 또는 ‘사친당(思親堂)’이라 불렀고 ‘정자를 지은 건 어머니 묘소를 보기 위한 것/ 부모님 여읜 이 몸 벌써 쉰 살이라네’라고 노래했다.

6세에 어머니를 떠나야 했던 어린 소년 조준도(趙遵道)는 불혹이 넘어 돌아와 그 골짜기에 어머니를 묻었다. 그리고 묘소가 아득히 바라다 보이는 자리에 정자를 짓고 스스로 ‘방호’라 했다. 조준도가 17세였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형 형도와 동생 동도가 창의해 나아갈 때 그는 늙고 병든 어머니를 모셔야 했다. 그는 형제들에게 ‘남아의 사업이 어찌 헛될 것인가/ 괴수 수길(秀吉)의 목을 베고/ 능연각 위에 내건 후에/ 창주(滄州)로 돌아와 낚싯대를 드리우리라’며 격려했다.

정묘호란 때는 여헌 장현광과 우복 정경세에 의해 의병장으로 발탁돼 전장에 나섰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굴욕의 강화 이후 그는 대둔산에 들어가 자취를 감추고 오랫동안 나오지 않았다. 이후 그는 더 이상 벼슬자리에 나가지 않았고 방호정에 파묻혀 학자들과 강론하기를 즐겼다. 궁핍한 사람이 있으면 창고를 열어 넉넉히 도와주었고 노복과 가축까지 나누어 주었다. 그는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청송읍 대곡(大谷)에 묻혔다.

1863년 유림과 종중에서 방호정 곁에 묘우를 세우고 제향했으나 고종 때 훼철되었고 지금 방호정 옆에는 ‘방호조선생향사유허비(方壺趙先生享社遺墟碑)’만 우뚝 서있다. 방호정은 1984년 12월29일 경북도 민속문화재 제51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함안조씨대동보. 청송군지. 청송의 혼, 누정.

공동기획지원 청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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