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경의 영화의 심장소리] ‘사랑의 시대’ (토마스 빈터베르그·2016·덴마크)

  • 임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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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1-15   |  발행일 2019-11-15 제42면   |  수정 2020-09-08
진정한 사랑이 사라진 시대
[김은경의 영화의 심장소리] ‘사랑의 시대’ (토마스 빈터베르그·2016·덴마크)
[김은경의 영화의 심장소리] ‘사랑의 시대’ (토마스 빈터베르그·2016·덴마크)

덴마크 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 바로 ‘휘게’다. 편안하고 안락한 상태를 말하는 ‘휘게’는 소박한 행복을 일컫는 표현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휘게’ 덕분인지 덴마크는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로도 알려져 있다. 하지만 내가 본 덴마크 영화들은 대체로 어두웠다. 거장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영화들이 그랬고, 토마스 빈터베르그 감독의 걸작 ‘더 헌트’가 그랬다. 진지한 영화들만 소개되어서일까. 소박한 행복 이면에 감춰진 어두운 면을 이야기하고 싶어서일까. ‘사랑의 시대’ 역시 사랑 이야기임에도 진지하고 묵직하다.

대저택을 상속받은 에릭은 부인인 안나의 제안으로 친구들과 함께 공동체 생활을 시작한다. 남자 넷과 여자 셋, 그리고 두 명의 아이들까지 자유롭고 평등한 생활 속에서 이상적인 공동체를 꾸려나간다. 하지만 교수인 에릭이 제자 엠마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그녀의 등장으로 이들의 삶에는 균열이 생긴다. 안나는 남편의 사랑을 담담하게 받아들이지만, 그녀의 내면은 갈수록 무너져간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그녀는 어떤 선택을 할까.

영화는 감독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대본 및 감독을 맡은 토마스 빈터베르그는 7세부터 19세까지 공동체에서 살았다고 한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인 1970년대에는 그런 공동체가 많았다. 억압에 대한 저항으로 유럽 전역에 불어닥쳤던 68혁명의 영향이었다. 덴마크가 자랑하는 감독답게, 공동체와 개인에 대해 많은 질문을 던지게 한다. 감독은 어디까지나 사랑 이야기임을 강조하지만 말이다.

공동체 생활을 처음 제안한 것은 안나였다. 자신은 그런 체질이 아니라며 남편은 반대한다. 안나가 공동체를 제안한 이유는 “현재 생활이 지루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몰고 올 파국을 짐작조차 못한 채. 이채로운 것은 딸 프레아의 시선이다. 에릭과 안나의 딸인 10대 소녀 프레아는 엄마와 아빠, 그리고 함께 사는 어른들을 조용히 관찰한다. 무너져 가는 엄마의 모습을 보며, 공동체를 떠나라고 말하는 것도 프레아다. 어른들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을 때, 소녀는 자신의 방식으로 스스로 어른이 되려고 한다.

프레아의 시선이 바로 어린시절 자신의 것이라고 감독은 고백한다. 이혼한 부모들이 공동체를 떠날 때도 자신은 그 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어른들이 무책임할 때, 아이가 짊어져야 할 책임감은 너무나도 무거운 것이라고 그는 덧붙인다. 영화의 스토리가 픽션이라고 하지만,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많이 들어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프레아를 좋아하던 꼬마 빌라스의 죽음도 상징적이다. 심장병을 앓던 그는 어린 나이에 목숨을 잃는다. “빌라스는 사랑이 사라진 시대에는 살 수 없어 하늘나라로 갔다”고 아빠는 말한다. 사랑과 이상으로 충만했던 한 시대가 사라졌음을 선언하는 듯하다. 빌라스의 죽음은 그렇게 순수했던 한 시대가 저물었음을 상징한다. 그것은 한 시대의 소멸인 동시에 주인공 안나의 사랑 역시 사라졌음을 말한다.

베를린영화제 여우주연상에 빛나는 안나 역의 트린 디어홈의 연기가 압권이다. 냉철한 이성으로 무장하지만, 요동치는 감정 앞에서 흔들리는 여인의 심리를 생생하게 표현해 낸다. 비록 문화는 다르지만 사람의 마음은 똑같음을 확인하게 된다. 인간의 심리를 꿰뚫는 듯한 스토리의 힘이 보는 이의 공감대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영어 제목은 공동체를 나타내는 ‘코뮌(Commune)’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붙인 제목 ‘사랑의 시대’는 역설적으로 보인다. 진정한 사랑이 사라진 시대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사랑이 넘치는 시대, 이상향을 꿈꿨던 시대에 대한 실패담이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무너져 내렸던 인간들에 대한 기록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사랑의 시대’를 포기할 수 없다. “행복은 수레일 뿐, 수레를 끄는 말은 사랑”이라고 한 조지 베일런트의 말대로 사랑 없이 우리는 행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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