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근의 시대공감] 구하라의 비극이 사회적 사건이 된 이유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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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1-29   |  발행일 2019-11-29 제22면   |  수정 2020-09-08
남친에 휘두른 단순폭력을
영상협박과 동일선상 인식
위로커녕 악플로 집단공격
성범죄의 양형기준도 관대
언제든지 또다른 비극 우려
[하재근의 시대공감] 구하라의 비극이 사회적 사건이 된 이유

11월15일에 “가해자 중심적인 성범죄의 양형 기준을 재정비해 주세요”라는 청원이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등록됐다. 24일 구하라 사망 소식이 알려진 후 하루 만에 10만 명 이상의 시민이 여기에 동의하는 등 관심이 쏟아지며 순식간에 동의자 23만 명을 넘어섰다.

청원인은 자신이 “올해 초 강간미수에 가까운 성추행을 당해 고소한 피해자”라며 “가해자가 자신의 죄를 인정했으나 어떠한 합의와 사과, 반성 없이 기소유예 결과가 나왔다”고 성범죄에 관대한 법을 비난했다. 구하라 사망 이후 이 청원에 사람들의 관심이 급증한 것은 구하라도 억울한 일을 당했다는 인식 때문이다.

구하라는 최근 1년여간 악플지옥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한 사이버 비난을 당했다. 한국에서의 활동이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올 5월에도 극단적인 선택을 했는데 당시 우울증이 심각하다는 전언이 나왔다. 그래도 사람들은 구하라에게 호의적이지 않았고 결국 이번 비극이 터지고 말았다.

구하라를 향한 공격은 전 남자친구의 폭로가 터진 시점부터 시작됐다. 구하라가 전 남자친구에게 폭행을 가해 얼굴에 상처를 냈다는 내용이었다. 곧바로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다. 그런데, 구하라와 전 남자친구가 이별하는 과정이었으며 사건 당시 남자친구가 먼저 구하라에게 폭력을 행사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러면 이별폭력의 가능성을 떠올릴 수 있다. 이별폭력은 이별과정에서 상대에게 가해행위를 하는 것으로 요즘 심각한 문제이고 주로 여성이 피해를 당한다. 이런 문제의 가능성이 제기됐으면 일단 비난을 멈추고 사실관계가 드러나는 것을 지켜봐야 했는데도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구하라를 비난했다.

남자친구 쪽이 언론 인터뷰도 하며 일방적으로 피해를 당했다는 식의 하소연을 한 반면, 구하라 측은 적극적으로 해명하지 않고 침묵을 지킨 게 대중 공격의 빌미로 작용했다. 그러다 놀라운 사실이 알려졌다. 그 침묵이 남자친구의 영상물 폭로 협박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구하라가 남자친구 앞에서 무릎을 꿇고 비는 모습의 사진이 나오고, 남자친구가 영상물로 위협하는 듯한 내용의 녹취도 나왔다.

이별폭력 가능성에 이어 영상 협박까지 등장한 것이다. 이러면 설사 구하라가 먼저 남자친구를 폭행했다 하더라도 경미한 부상의 맨손 폭행이기 때문에 사건 전체적으로 보면 구하라가 피해자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폭행까지 남자친구가 먼저 시작했다고 하면 죄질이 안 좋아진다. 구하라가 가한 폭행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일이 이 지경이 됐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구하라를 비난했다. 그나마 중립적이라는 사람들은 “쌍방폭행이니 둘 다 똑같다”고 했다. 어떻게 영상 협박과 단순 폭행이 ‘쌍방’이라는 이름으로 동일선상에 놓일 수 있단 말인가? 이건 여성이 주로 피해를 당하는 이별폭력과 영상 협박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미약한가를 보여준다.

검찰은 남자친구를 기소했다. 그런데 재판에서 또 문제가 생겼다. 구하라에게 엄청난 심적 고통을 안기고 국내 연예 활동까지 힘들어지게 만든 남자친구에게 집행유예 3년이 선고된 것이다. 이건 사법부가 영상 협박을 너무 가볍게 본 처사라고 사람들은 인식했다. 그래서 구하라 사망 이후에 “가해자 중심적인 성범죄의 양형 기준을 재정비해 주세요”라는 청원으로 사람들이 몰려간 것이다.

이렇게 보면 구하라 사건이 여성이 주로 피해를 당하는 사건에 대한 한국사회의 태도를 드러낸다는 걸 알 수 있다. 구하라는 위로를 받기는커녕 이별폭력, 영상 협박 등에 둔감한 사람들로부터 집단공격을 당했다. 그것에 맞서 싸워주는 이도 없었고, 그렇게 그녀는 고립돼 갔다. 지금처럼 여성이 당하는 폭력에 둔감한 풍토에선 언제든 또 다른 비극이 터질 수 있다.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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