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영화] 미안해요, 리키

  • 윤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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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2-20   |  발행일 2019-12-20 제42면   |  수정 2019-12-20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지만 행복할 수 없는 이유
20191220

“안해 본 일 없습니다. 기반공사, 배수, 굴착, 목공…심지어 무덤까지 팠으니 말 다 했죠.” 금융위기의 여파로 졸지에 실업자 신세가 된 리키(크리스 히친)는 택배 기사로 새 삶을 시작하기 위해 회사 매니저와 면접을 보는 중이다. 매니저는 “이 일의 성격은 채용의 형태가 아닌 자영업자가 돼 합류하는 것”이라며 “임금 대신 배송 수수료를 받게 된다”고 말한다. 문제는 일을 하려면 배달용 밴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리키는 자금이 부족하다.

노인과 장애인을 돌보는 요양복지사로 일하고 있는 리키의 아내 애비(데비 허니우드). 시간 외 수당을 지급받지 못하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이들에게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늘 시간에 쫓겨 저녁을 먹을 시간도, 아이들과 함께 할 시간도 없다. 부부에겐 한 때 우등생이었지만 지금은 학교 대신 그래피티에 빠져 사는 아들 세브(리스 스톤)와 어른스러운 착한 막내딸 라이자(케이티 포록터)가 있다. 흔들리고 있는 가족의 삶을 되찾고 싶었던 리키는 결국 애비의 차를 팔아 밴을 구입하기로 한다.


금융위기와 실직…새롭게 시작한 택배 기사의 삶
강도높은 노동, 가족과도 멀어지며 엉망진창 상황



‘나, 다니엘 블레이크’로 신자유주의 복지국가의 허상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던 켄 로치 감독이 이번엔 성실하게 살아가는 영국의 한 가족이야기에 포커스를 맞췄다. 켄 로치 감독의 4년 만의 신작 ‘미안해요, 리키’는 택배 회사에 취직한 가장 리키가 예상 밖의 난관을 마주하게 되는 상황을 극적인 과장이나 별다른 개입 없이 담담하게, 그리고 사실적으로 카메라에 담은 작품이다. 은행과 주택 금융 조합이 무너져 단기 임대와 긴축 정책으로 모두가 고통을 겪어야 했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가 배경이다.

금융위기로 직격탄을 맞은 소시민들의 불안정한 일자리는 ‘긱 이코노미’(정규직보다 계약직이나 프리랜서 등을 주로 채용하는 경제 현상)라는 새로운 경제 상황에 기인한다. 영화는 현대를 살아가는 영국 소시민을 대변한 리키와 애비 부부를 통해 이러한 생산구조의 변화가 어떻게 가정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인간관계에까지 투영되는지를 보여준다. 이는 ‘블루칼라의 시인’으로 불리는 켄 로치 감독의 전공분야이기도 하다. 그는 ‘편리한’ 긱 이코노미가 과연 사람을 향하는 것인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내일의 희망을 배달하지만 정작 오늘 자신들이 행복할 시간은 부족한 리키와 애비 가족은 오늘날, 우리가 성실하지만 행복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한 묵직한 해답을 제시한다.

리키는 하루에 14시간, 주 6일 근무한다. 택배 기사일을 통해 빚을 갚고 집도 사겠다는 희망을 품었던 그는 점차 강도 높은 노동과 뜻밖의 변수들로 인해 지쳐간다. “사는 게 이렇게 힘들 줄 몰랐다”며 수시로 되뇌이지만, ‘제로 아워’(정해진 노동시간 없이 일한 만큼 시급을 받는 노동 계약)계약으로 추가 시간에 대한 수당없이 14시간가량 노동을 감내해야 하는 애비의 상황도 별반 다를 게 없다. 게다가 아들마저 엇나가면서 리키 가족은 모든 게 엉망진창의 상황이 된다. 그나마 딸 라이자가 아빠와 함께 택배 배달을 하는 모습만큼은 관객을 미소짓게 한다.

‘미안해요, 리키’는 오늘 내 이야기 같은 가족 이야기로 깊은 공감을 만든다. 매일 최선을 다해 살지만 항상 시간이 부족하고, 가족을 위해 일할수록 가족과 멀어지는 아이러니한 상황까지 포함해서다. 이는 IMF 외환위기 이후 증가된 가계부채 및 비정규직 비율로 위기를 겪게 된 우리의 모습과 상통한다는 점에서 더 깊고 짙은 울림을 전한다. (장르:드라마 등급:12세 관람가)

윤용섭기자 yys@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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