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칠곡 담양담·경수당

  • 임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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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1-10   |  발행일 2020-01-10 제36면   |  수정 2020-01-10
고마운 옛원님 고향 찾아와 쌓은 담장
아름다운 이야기가 차곡차곡 쌓인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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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사랑채 동측의 담양담이 언덕을 올라 안채의 뒤안을 부드럽게 감싼다. 석축은 근래에 쌓은 것으로, 원래는 흙 축대 위에 텃밭이 있었다고 한다.

칠곡군 지천면(枝川面). 경부고속도로와 경부선, 경부고속철도가 지나간다. 면 소재지는 '신리(新里)'로 경부선 신동역이 생기면서 새로 생겨난 동네다. 교통방송에서 늘 도로 사정을 알려주는 '신동재'가 바로 이 마을에 있는 고개다. 조선시대에는 지천면을 상지면(上枝面)이라 했다. 상지의 지(枝)와 면의 주요 하천인 이언천(伊彦川)의 끝 글자를 합한 것이 '지천'이다. 상지는 마을의 생김새가 매화나무의 윗가지 같이 생겼다는 땅이다. 그곳에 처음 터를 잡은 이는 약 500년 전 성종 때의 광주이씨(廣州李氏)였다고 한다. 지금의 상지는 작은 자연부락이지만 옛날에는 일대의 중심이었던 모양이다.

조선 성종 때 광주이씨가 터 잡고 산 일대 중심지
매화나무 윗가지 같은 마을 생김새 '상지'라 불러
담양사람들이 석담 이윤우 찾아와 농사일 등 챙겨
오래오래 무너지지 말라고 공들여 쌓은 '담양담'

석담의 스승 모신 사양서당…강당 경회당만 남아
현재 벽진이씨 후석파 종택으로 주인 바뀐 '경수당'


◆담양담

높은 머리 위에는 고속의 철길이 소리도 없이 육중한데, 상지의 좁은 마을 안길에는 제법 다양한 차들이 흘러갔다. 길 가의 검고 두꺼운 나무들은 이 길이 오래전부터 쓰임이 많았을 거라는 느낌을 주었다. 걸어서, 전라도 담양에서 이곳까지 며칠이 걸릴까. 타박타박 쉼 없는 걸음이라 할지라도 초승달이 반달이 되는 시간, 혹은 만월이 되는 시간은 걸리지 않았을까. 그렇게 스무 명 남짓한 담양 사람들이 잊지 못하는 고마운 이를 찾아서 이곳에 왔다고 한다. 인조 때의 일이다.

상지마을의 북측 끝 언덕아래에 광주이씨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의 집이 있었다. 석담은 선조 2년인 1569년에 태어나 처음에는 이이(李珥)로부터 수학하였고 나중에는 정구(鄭逑)의 문인이 되었다. 그는 대과에 급제한 뒤 인조 때 담양 부사로 부임했다. 석담이 임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간 후 담양 사람들은 생각했다. 곳간에 양식이 떨어지지는 않았을까, 농사일은 누가 할까. 그들은 지난 시절 고마웠던 원님을 걱정해 결국 여기까지 왔던 것이다. 석담의 집은 담장이 허물어져 있었다. 그들은 옛 원님의 농사일을 돕고 허물어진 담장을 고쳐주었다고 한다. 그때의 그 담장이 지금도 남아 있다. 사람들은 그 담을 담양담이라 부른다.

석담의 옛집은 대한제국 말기에 주인이 바뀌었다. 지금은 벽진이씨(碧珍李氏) 후석파(后石派) 종택인 경수당(敬守堂)이 자리한다. 중문을 지나 안채의 뒤쪽 모서리 부분에, 언덕을 타고 올라가는 멋있는 담장이 보인다. 멋있는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 담장이 멋있어 보이나? 제각각의 돌들이 흙과 함께 차곡차곡 언덕의 곡선을 따르고, 그 위를 와편과 흙을 촘촘하게 직선으로 쌓아 단정하게 마무리해 놓았다. 두껍고 탄탄해 보였고 성곽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오래오래 무너지지 말라고, 얼마나 공들여 쌓았겠나. 담 너머 대밭이 맑다.

◆벽진이씨 후석파 종택, 경수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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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진이씨 후석파 종택. 안채, 안중사랑채, 사랑채가 'ㄷ'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다.

대한제국 말기에 이곳을 소유했던 사람은 김낙헌(金洛憲)이다. 일제의 한일병합에 충실하게 협조한 법조인으로 일제로부터 합병기념장을 받고 일제강점기 하에서도 검사, 판사로 있으면서 애국인사들을 탄압한 인물이었다. 그가 이 집을 소유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은 듯하며 이후 후석(后石) 이주후(李周厚)가 매입하면서 벽진이씨 후석파의 종택이 되었다. 이주후는 조선 말기 및 일제강점기 도내에서 명망 있던 유학자로서 평생 학문에 전념한 인물이다. 법무장관 이우익(李愚益), 대법관 이우식(李愚植), 사업가 이우혁(李愚奕)이 그의 아들이며 지천면 신리의 신동중학교, 칠곡고등학교 부지가 이들 집안에서 희사한 땅이라 한다.

경수당은 2018년 여름에 복원을 마쳤다. 지붕의 망와에 새겨진 명문에 따르면 경수당은 18세기 말에 처음 지은 후 19세기 중엽에 수리했다고 한다. 이후 근대와 현대를 거쳐 오면서 생활의 편의를 위해 증·개축하기도 했지만 목구조는 그대로 유지해왔기 때문에 원형 회복이 가능했다. 대문채를 통과하면 경수당 현판이 걸린 사랑채를 마주한다. 좌측으로는 중문과 광이 딸린 행랑채가 연접해 있다. 중문을 통과하면 안채가 길게 자리하고 그 우측에 안중사랑채가 위치해 있다. 안중사랑채 뒤편으로 영역을 구분한 중사랑채가 있었는데 몇 년 전 태풍의 피해를 입고 철거된 뒤 경수당에서 유일하게 복원되지 못했다.

종택 전체가 기와를 얹은 흙돌담에 둘러져 있다. 안채 뒤편의 석축 위에 길고 부드럽게 담장이 둘러져 있다. 석축은 원래는 큰 자갈돌을 박아 넣은 흙 축대였는데 지난 복원 때 돌로 새로 쌓았다고 한다. 안채 왼편의 담장은 부분적으로 허물어져 접근 금지 안내문이 걸려 있다. 담장은 긴 시간이 흐르면서 많이 보수되었고, 실제의 담양담은 경수당의 동쪽에 조금 남아있다고 한다. 돌 하나 흙 한줌만 남아 있었다 해도 따뜻한 감동이 줄어들었을 것 같지는 않다. 변화는 당연한 것이고 오히려 여전한 것이 놀라운 일이다.

◆사양서당 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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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서당 강당의 팽나무. 수령 330년인 보호수로 광주이씨석담공칠곡종중에서 관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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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서당 강당. 한강 정구와 석담 이윤우, 송암 이원경을 배향하고 있다.

경수당에서 북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지천 저수지 아래에 사양서당강당(泗陽書堂講堂)이 있다. 강당 초입에 내려서자 가까운 대문간에서 강아지가 캉캉 짖는다. 선한 얼굴의 아저씨가 나타나 강아지를 쓰다듬으며 무언가 조곤조곤 말하자 캉캉 소리가 뚝 그친다. 멀지 않은 길 끝에 솟을대문과 담장너머로부터 솟아오른 오래된 팽나무의 실루엣을 고즈넉이 마주한다. 사양서당은 석담의 스승인 한강 정구를 모신 곳으로, 원래 그가 일생 학업을 닦았던 칠곡군 사수동에 있었다. 효종 2년인 1651년에 창건되었고 숙종 20년인 1694년에 이곳으로 옮겨 정구를 주벽으로 석담 이윤우를 배향하고 석담의 종조인 송암(松巖) 이원경(李遠慶)을 별사에 모셨다.

사양서당은 흥선 대원군 때 대부분 헐리고 지금은 강당인 경회당(景晦堂)만 남아있다. 너른 마당에 저 혼자여도 단정하고 간결하고 견실한 모습으로 우뚝하다. 정면 모서리의 팽나무는 수령 330년으로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광주이씨석담공칠곡종중'에서 관리한다는 안내판이 있다. 광주이씨 후손들은 현재 칠곡군 왜관읍 매원마을에 세거하고 있다. 이윤우의 호인 '석담'은 '바위가 깊게 움푹 패어 물이 맑게 괸 소(沼)'를 뜻한다. 석담은 율곡 이이의 또 다른 호이기도 하다. 퇴계와 율곡, 한강, 석담으로 이어지는 계보에서 공자의 '위정이덕(爲政以德)'을 떠올린다.

'정치를 덕으로써 한다는 것은, 북극성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뭇 별들이 거기로 모여드는 것과 같다.' 석담은 인조 12년인 1634년에 세상을 떠났다. 비문은 미수(眉수) 허목(許穆)이 지었으며 성주의 회연서원에도 스승인 한강 정구와 석담이 함께 배향되어 있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정보

대구 북구 팔달교 건너 4번 국도를 타고 왜관방향으로 가다 덕산리에서 923번 지방도인 지천로를 따라 간다. 지천어린이집 방향으로 들어가면 근방에 신4리 경로당이 있다. 경로당 맞은편에 칠곡 경수당이 위치한다. 경수당 앞에서 상지1길을 따라 북향하다 지천저수지 둑이 보이면 그 아래쪽에 자리한 사양서당강당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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