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70주년 영남일보 특별기획 1부-경북의 戰線 .2] 백선엽 장군과 다부동 전투

  • 마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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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1-20   |  발행일 2020-01-20 제12면   |  수정 2020-01-20
전쟁 운명 가른 '사단장 돌격'
"하룻밤 격전에 병사 3분의 1 잃어
다음날 신병으로 채우고 전투…
나중엔 부대원 얼굴 이름도 모를 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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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 우세를 앞세워 파죽지세로 밀고 오는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폭파한 왜관철교.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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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린스 미 육참총장(가운데)과 워커 8군사령관(맨왼쪽)에게 전황보고하고 있는 백선엽 장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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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전의 일이라고요? 저는 어제도 꿈속에서 부하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전쟁이 터진 뒤 길고 긴 후퇴 끝에 맞았던 다부동, 이곳을 지키기 위해 스러져 간 수많은 전우에 대한 생각을 하면 아직도 가슴이 아파요. 당시 잃은 병사 수가 3천400명 정도인데 혈육과 같은 이들을 어찌 잊을 수 있겠어요. 후세가 제대로 기록하고 제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백수(白壽)의 나이에도 목소리만큼은 젊은이 못지않게 혈기가 넘쳤다. 백선엽 장군은 마치 70년 전의 전투를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증언했다. 다부동 지구 전투를 승리로 이끈 활약으로 그는 6·25 전쟁영웅으로 불린다. 일부에서는 친일 행적을 비판하며 그의 공적을 폄훼하지만 공과 과는 엄격히 구분될 필요가 있다. 백 장군과 다부동전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적 관계와도 같다.

다부동 전투는 3만여명의 희생자가 났을 정도로 6·25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다. 303고지(자고산)~328고지(석적읍 포남리)~숲데미산(석적읍 망정리)~유학산(석적읍 성곡리와 가산면 금화리 일대)을 잇는 방어선에서 벌어진 전투다. 북한군 3개 사단을 궤멸시킨 전투로, 북한군 2만4천명과 국군 1만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다부동은 대구 방어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특히 국군 제1사단이 담당한 약 20㎞의 방어선은 남한 '최후의 보루'였다. 결국 다부동 전투의 승리는 6·25전쟁의 운명을 뒤바꾼 가장 중요한 전투가 됐다.

#1. 위기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북한군은 탱크를 앞세워 파죽지세로 압박해 왔다. 개전 3일 만에 북한군에 의해 서울이 함락됐다. 이후 북한군은 '8월 공세'를 펼치며 국군과 미군을 밀어붙였다. 당시 백 장군의 제1사단은 대구 북방 다부동에서 방어선을 치고 있었다.

전황은 위태로웠다. 우선 수적으로 열세였다. 당시 1사단 병력은 학도병을 포함해 7천600명인 데 비해 적은 2만1천명이 넘었다. 장비와 화력도 비교가 되지 않았다. 당시 1사단 화력은 105㎜ 곡사포 12문을 비롯해 160문 정도였다. 이에 비해 적은 122㎜ 곡사포 20문을 비롯해 총 670문의 화력을 갖췄고, T-34 전차가 20여대 있었다. 병력은 1대 3, 화력은 1대 4 비율이었다. 북한군은 8월15일을 '대구 광복의 날'로 정하고 1사단 정면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다부동 전선 최대의 위기였다.


"다부동 방어선 뚫리면
순식간에 대구 함락
미군 대한민국 버릴까
두려움 커 전선 달려가

후퇴하는 병사 앉히고
내가 선두에 서겠다
내가 물러서면 날 쏴라
곧 그들의 함성으로
골짜기가 진동했다"



8월13일 주 저항선인 왜관~다부동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졌다. 국군 제1사단은 주 저항선에 3개 연대를 배치하고 백병전으로 맞섰다. 고지로 올라가는 길목마다 시체 썩는 냄새로 숨을 쉴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하룻밤 격전을 치르고 나면 총원의 30~40%가 손실되고, 다음날 또 신병으로 교체됐다. 나중에는 분대장이 분대원 얼굴과 이름도 기억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누가 전사하고 후송됐는지 파악할 새가 없을 정도로 전황이 급박했다. 그런 극한 상황은 계속됐고, 북한군은 837고지∼647고지∼진목정까지 진출하며 계속 위협을 가해 왔다.

#2. 반전

주 저항선이 무너질 위기에 몰리자 백 장군은 대구에 있던 미 8군사령부와 2군단사령부에 증원부대를 요청했다. 8월16일 드디어 미군의 공중지원이 이뤄졌다. B-29 폭격기 99대로 북한군 진영인 왜관 북서쪽 낙동강변에 960t의 폭탄을 집중적으로 투하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래 최대 규모의 융단폭격이었다. 그러나 18일부터 북한군은 더욱 미친 듯이 공세를 취해 왔다. 장병은 쉴 틈도 없이, 어떤 부대는 보급도 받지 못한 상황에서 전투를 벌여야 했다. 고지를 뺏고 뺏기는 혈투가 계속되던 8월20일 미 27연대 좌측 능선을 엄호하던 국군 11연대 1대대가 고지를 탈취 당하고 다부동 쪽으로 후퇴한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미 8군으로부터 "한국군은 도대체 싸울 의지가 있느냐"는 질책이 들려왔다. 측면이 뚫린 미 27연대는 퇴로가 차단되기 전에 후퇴하겠다는 입장을 전해 왔다.

다부동이 뚫리면 50리 남쪽 대구는 곧 적의 수중에 떨어지게 된다. 대구가 함락되면 미군은 울산~밀양~진해를 연결하는 데이비드슨선 아래로 물러나게 돼 있었다. 데이비드슨선은 미군 철수의 안전을 위한 최소한의 공간 확보용이었다.

백 장군은 미 27연대장에게 "기다려 달라. 내가 직접 가보겠다"고 말하곤 현장으로 달려갔다. 2대대는 뿔뿔이 흩어져 후퇴하고 있었다. 장병들이 계속된 주야격전으로 지친 데다 보급이 끊겨 이틀째 물 한 모금 못 마셨던 것이다. 그때 그는 후퇴해 오는 병사들 앞을 가로 막았다. 그리곤 병사들을 땅바닥에 앉히고 "내가 선두에 서겠다. 내가 물러서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라는 명령을 내린 후 전선을 향했다. 세계 전사에 남을 '사단장 돌격'이었다. 곧 병사들의 함성으로 골짜기가 진동했다. 2대대는 삽시간에 488고지를 재탈환했다.

8월21일은 다부동 전투의 고비이자 전환점이 됐다. 그날은 피아간에 기습에는 기습, 돌격에는 돌격으로 맞서며 고지와 능선마다 시체가 쌓여 갔다. 북한군은 해만 지면 공격을 퍼부었고, 교전은 밤새도록 이어졌다. 8월22일 마침내 전세가 아군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북한군의 8월 총공세의 예봉은 점점 무뎌져 갔다.

#3.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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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의 9월 총공세 당시 피아배치 상황.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제공〉

8월31일부터 9월15일까지는 전투 지역 재조정 후 동명면과 가산면 일대에서 공방전이 있었다. 이후 9월24일까지 북한 방어선을 돌파하는 작전으로 전개됐다. 이 두 시기의 전투를 일러 '9월의 공방전'이라 부른다. 왜관~다부리 전선은 8월의 격렬하고도 위급했던 전황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전반적으로 전열이 흐트러져 있었다. 다부동의 미군 제23·27연대를 소속 사단으로 복귀시키고 전선을 재조정했다. 다부리 정면에서 가산까지는 미군 제1기병 사단이, 그 오른쪽 팔공산 정면은 국군 제1사단이 맡았다. 9월2일부터 전개된 북한군의 9월 총공세는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되기 전까지 이어졌다. 8월 한 달간 수많은 희생을 통해 방어한 왜관~다부리 주 저항선이 다시 무너졌다. 9월15일 국제연합(UN)군이 맥아더의 지휘 아래 인천에 상륙하고 총 반격이 시작됐다.

이후 국군 제1사단은 팔공산~가산 일대에서 북한군을 빠르게 격퇴시켰다. 9월22일 미 제8군은 낙동강 전선의 각 부대에 작전 명령 A108호를 발령하고 북한군에 대한 전면적인 추격령을 내렸다. 그날 국군 제15연대가 가산면 천평리 일대에서 365고지∼금화리로 남진해 미군 제14기병 사단과 협공을 펼치자, 다부리 일대의 북한군 제13사단은 붕괴되기 시작했다. 북한군은 후퇴하기에 급급했고, 낙동강 방어선에서 벌어진 왜관∼다부동의 치열했던 공방전은 결국 국군과 UN군의 승리로 끝났다.

대한민국의 운명을 가른 다부동 전투는 이렇게 마무리됐다. 결국 백선엽 장군의 제1사단은 제6사단과 함께 국군의 선봉에 서게 된다. 이후 평양의 지리에 익숙한 백선엽 장군은 1950년 10월 맨 앞에서 대동강을 도하해 평양에 입성한다.

"대구방어의 핵심인 다부동 전투는 절대 잊을 수 없어요. 한적한 촌락인 다부동은 민가가 30호도 채 되지 않는 곳이었어요. 하지만 상주와 안동에서 대구로 향하는 교통의 요지로 방어선이 뚫리면 대구 전체가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위기에 봉착하게 되는 탓에 목숨을 걸지 않을 수 없었어요. 대구를 내주면 제주로 향해야 하는데, '결국 미군이 대한민국을 버리지 않을까'라는 두려움도 컸던 게 사실입니다. 반드시 다부동을 지켜야 했던 이유였어요."

칠곡=마준영기자 mj3407@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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