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나무보다 빨리 자랄 수 있을까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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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2-21 07:41  |  수정 2020-02-21 07:57  |  발행일 2020-02-21 제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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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왔다. 앙상한 가지만을 남겨 놓은 채 차디찬 겨울을 보낼 준비를 하는 헐벗은 나무를 보면서 이 추운 겨울에 나도 잘 견뎌야 한다고 생각한 지가 엊그제인데 벌써 봄이다.

한 도시의 오랜 역사는 위대한 선배들의 빛나는 업적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노력과 어둠에 대한 항거로 만들어진 하늘을 수놓은 별이다. 인간은 나약해서 부패하기 쉽고, 고집으로 사회를 망치기도 한다. 선을 지키는 건 어렵다. 그 선이 선·악을 구분하는 절대적 가치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작은 일 하나라도 '제대로' 한다는 건 힘든 일이다.

세상에는 예전에 미처 풀지 못하고, 알지 못했던 새로운 문제들이 생긴다. '미투' '퀴어' '트랜스젠더' '동물권' '지속가능한 발전' 등은 우리가 예전에 민감하게 느끼지 않았던 것들이다. 우리는 어떻게든 당면의 문제를 풀어야 한다. 낡은 카테고리와 패러다임은 한계를 보인다. 오래된 과제를 포기하는 게 능사가 아니며, 새로운 것만이 옳은 것도 아니다. 그래서 세상은 살기 힘들고, 그래서 세상은 여전히 할 일이 많고,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

추운 겨울이 오면 나무의 살아가기는 힘들어진다. 봄부터 피워낸 많은 잎을 가지고 겨울을 나기란 엄두가 나지 않는다. 나무는 결단을 내리고, 잎을 떨어내고 봄이 올 때까지 버틴다. 여름의 절정인 7~8월까지 활발하게 나오는 성장 호르몬을 9월부터 멈추고 '떨켜층'을 만들어내어 잎들을 떨어낸다. 나무의 폭발적인 성장은 기다림의 결과다.

못나고 능력 없는 이웃을 부끄러워하고, 잘 알지 못하는, 빛나 보이는 이들을 소망한다. 말해야 할 이들은 말하지 않고, 행동할 사람은 행동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아야 할 사람은 말을 많이 하고, 행동을 잠시 멈춰야 할 사람이 너무 많이 움직인다.

봄이 왔다. 우리는 나무보다 더 빨리 자랄 수 있을까? 나무보다 더 빨리 자라서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하늘 끝까지 가지가 뻗고, 태양 빛을 더 많이 받으려 수없이 많은 잎을 만들고, 그들을 키우려 땅속의 뿌리를 더 확장해가면 우리는 나무보다 더 빨리 자랄 수 있을까? 나무보다 빠르게 자라거나, 느리게 자라는 방법은 없다.

한자리에서 나무는 자신의 성장을 위해 수개월의 웅크림을 준비하고 소중한 잎을 떨어낸다. 아직 웅크림을 지겨워하고 떨어낼 것을 가르지 못하는 나의 우둔함은 이 봄, 자연의 폭발적인 성장만을 부러워한다.

최성규<시각예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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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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