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 토크] '정직한 후보' 라미란

  • 윤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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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3-06   |  발행일 2020-03-06 제39면   |  수정 2020-03-06
"이번엔 대놓고 웃겨보자 생각으로 덤볐다"

라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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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무시한 배우가 나올 것이다." 박찬욱 감독이 '친절한 금자씨'(2005)에 라미란을 캐스팅한 후 가장 먼저 떠오른 심상은 그랬다. 이금자(이영애)의 복수를 돕는 시크한 오수희 역으로 영화계에 첫발을 내디뎠지만, 지금의 라미란은 스릴러가 아닌 코미디에 특화된 배우로 독보적인 위치에 있다. 박 감독의 평가는 결국 이렇게 적중한 셈이다. "박찬욱 감독도 내가 코미디를 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여자 조연이 설 자리는 많지 않다. 스릴러가 됐든 코미디가 됐든 작은 역할이라도 많이 맡을 수밖에 없고, 대신 임팩트 있게 가야 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는데, 그 해답을 코미디에서 찾은 것이다."

라미란은 지난해 '내안의 그놈'(191만)과 '걸캅스'(162만)의 흥행을 견인한 명실상부 코믹 연기의 장인으로 자리매김했다. 쉽게 규정지을 수 없는 페이소스 가득한 코믹과 드라마로 의외의 효과를 도출시킨 라미란표 연기가 빛을 발한 덕이다. 앞서 '응답하라 1988'의 정봉이 엄마와 '막돼먹은 영애씨'의 지질한 동료로 존재감을 드러낸 그는 예능까지 섭렵하며 전 세대의 공감을 얻었다. 그 과정에서 "겹치지 않게, 질리지 않게, 다르게 보이게"를 지향하며 늘 긴장감과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던 그다. 최근 라미란은 자신의 특장을 극대화시킨 '정직한 후보'의 주상숙 역으로 관객과의 만남을 이어오고 있다. 라미란의 원맨쇼라 할 수 있는 '정직한 후보'는 거짓말이 제일 쉬운 3선 국회의원 주상숙이 선거를 앞둔 어느 날 하루아침에 거짓말을 못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좌충우돌을 다뤘다.

거짓말이 제일 쉬운 3선 의원 주상숙
하루아침에 거짓말 못하며 좌충우돌
매 순간 과장·억지스럽지 않게 접근

현장 스태프와 농담 자주하고 밝은편
평소엔 진중하고 말의 톤도 높지 않아

툭 던지면 잘 받아주는 최고의 캐스팅
원래 정치에 대해 잘 모르는 '정알못'
감독님이 관련 자료 많이 준비해 도움
코미디만큼 힘든 것이 정치인 것 같아
차기작은 가급적 상반된 이미지 선택

▶'정직한 후보'는 원작 속 주인공의 성별까지 바꿀 정도로 라미란을 위한 영화였다.

"꼭 나를 위해서는 아니고 영화 잘 되자는 생각에서 캐스팅했다고 하더라. 원작의 남자 주인공을 여자로 바꾸고, 그 역을 라미란으로 하자는 결정이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내가 생각해도 나 아닌 다른 누군가를 떠올리는 게 쉽지는 않았을 거다 ."(웃음)

▶어떤 면에서 끌렸나.

"시나리오가 되게 재밌었다. 부담스러울 만큼 내가 지고 가야 할 책임감의 무게가 컸지만, 그만큼 도전정신이 생겼다. 이왕 할 거라면 제대로 해보고 싶었다. 그동안의 접근이 '사실 나는 진지합니다'라는 콘셉트를 내세운 소심한 코미디였다면, 이번에는 대놓고 웃겨보자고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캐릭터에 맞춰야 했던 전작과 달리 나를 염두에 두고 쓴 시나리오라 나의 어떤 면을 눈여겨보았는지, 나를 어떤 방식으로 소개할지도 궁금했다."

▶자신의 역할에만 집중하면 되는 조연일 때와 달리 이야기를 끌고 가는 주연의 위치라는 점에서 많은 고민이 필요할 것 같다. 게다가 코미디 장르다 보니 그 부담감이 상당할 듯한데.

"정말이다. 언제 어디서 웃을지 모를뿐더러 기준도 제각각이다. 모두에게 그것을 다 맞추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 하지만 코미디는 늘 재밌기를 바란다. 때문에 시나리오만 보고 단순히 접근할 수는 없다. 관객이 언제 어떻게 웃을지 모르기 때문에 매 신, 매 장면마다 억지스럽지 않게 그 끈을 계속 부여잡고 있어야 한다. 과하거나 말도 안된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어서도 안된다. 그 경계에서 줄을 타는 게 힘들지만 다들 '라미란이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준비는 많이 하는 편인가.

"코미디는 미리 준비한다고 해서 재밌거나 웃길 수 있는 게 아니다. 상황에 맞게 임기응변으로 접근해야 하기 때문에 현장 분위기가 중요하다. 또 촬영 당일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웃음을 유발해야 하는 장면에서 슬프게 나올 수 있다. 가끔은 그게 뜻밖의 웃음을 유발하는 경우가 있어 지문과 반대로 접근한 경우도 가끔 있긴 하다."

▶실제 성격도 극 중에서처럼 밝고 유쾌한가.

"나와 달라 보이는 캐릭터라 할지라도 내 기본 베이스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결국은 다 나를 통해서 나오는 거다. 다만 극 중에서 보이는 건 내가 대체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모습들이다. 평소에는 정말 진중하고 말의 톤도 높지 않고 조곤조곤한 편이다."

▶영화 '친절한 금자씨'의 시크한 모습으로 인상 깊게 데뷔했는데 지금은 반대의 이미지로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래서 너무 신나고 재밌다. 새로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이랄까. 연극무대에선 주로 세고 임팩트 있는 감초 역할을 많이 했는데, 영화 쪽은 나에 대한 정보가 없으니 내가 어떤 이미지의 배우인지를 전혀 모른다. '친절한 금자씨' 이후 출연한 작품들도 코믹한 역할은 아니었는데, 현장에서 스태프들과 자주 농담을 하다 보니 내가 되게 재밌는 사람으로 비쳤던 것 같다. 그들이 코미디 장르에 나를 추천했고, 그렇게 몇 편 쌓이면서 어느 순간 코믹 이미지로 굳어졌다. 실제로 사석에서 나를 만난 사람들은 '왜 이렇게 조용하냐, 밥을 너무 조용히 먹는다'면서 정말 의외라고 말한다."

▶아무래도 코미디에 대한 자신감도 커졌을 것 같은데.

"자신감보다 코미디는 역시 어렵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고 있다. 평소에도 코미디를 쉽게 생각한 적은 없다. 전작들도 그냥 상황이 이런 거고 그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유발되는 재미가 있다고 생각했을 뿐, 내가 일부러 코믹 연기를 한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내 스타일은 크게 한방을 터뜨리기보다 계속 잽을 날리는 쪽이다. 촬영을 하면서도 혼란스러웠던 건 웃긴 건지, 아닌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아서다. 그만큼 현장에선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직한 후보'의 경우는 유치하든 어떻든 일단 웃겨보자는 생각으로 무작정 덤볐다."

▶배우들과의 호흡도 좋은 편이다. 그 역시 당신의 능력이라 할 수 있다.

"작품마다 캐스팅 조합이 좋았다. 미리 모여서 짠 건 아닌데 마치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온 사람들처럼 툭 던지면 알아서 척척 받는 수준이었다. 자주 밥을 같이 먹다 보니 그렇게 되는 것 같다.(웃음) '정직한 후보'는 특히나 회식이 잦았다. 그래선지 촬영 막바지에 보면 다들 체중이 늘었다. 나 역시 체중이 불어 바지가 터진 경험이 있다."

▶지난해 주연작 '내안의 그놈'과 '걸캅스' 모두 손익분기점을 넘었다.

"두 작품 모두 손익분기점만 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그렇게 잘 될지 몰랐다. 어렵게 달성한 만큼 의미 있는 성과라고 생각한다. '정직한 후보' 역시 무척 힘든 시기지만 나름 선전을 펼치고 있다. 오는 4월 총선을 앞두고 있다는 점과 '정직'이라는 단어가 강하게 어필한 것 같다."

▶평소 정치에 관심이 있는 편인가.

"전혀. '정알못'(정치를 알지 못하다)이고 관심도 없다. 감독님이 정치 종합선물세트처럼 이와 관련한 자료들을 많이 준비했다. 브라질 원작은 바람둥이 남자 국회의원이 주인공인 19금 영화다. 문화적인 차이가 워낙 크다 보니 설정만 따왔고, 우리는 주상숙 캐릭터가 나쁘거나 밉게 보이는 것을 경계했다. 그래서 이런 야박한 역할을 해도 웃어 넘길 수 있는 배우가 필요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이미지를 제대로 활용했다고 본다."(웃음)

▶순발력과 센스가 좋은 것 같다.

"그런 건 좀 있는 편이다.(웃음) 코미디는 되게 즉흥적인 순발력을 요한다. 벼락치기라고 하지 않나.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완전히 나를 비우고 간다. 되게 게으른 배우라고 할 수 있는데 그냥 현장 분위기를 타니까 되더라."

▶코미디에 특화된 배우라는 건 양날의 검일 수 있다. 그런 고민은 해보지 않았나.

"그래서 차기작은 가급적 전작과 다른 이미지의 작품을 선택하는 편이다. 직업이 바뀌거나, 전작에서 사극을 했으면 다음에는 현대극을 하는 식으로 변화를 주려고 나름 애를 쓰고 있다. 드라마 '블랙독'도 같은 맥락에서 선택한 작품이다. '정직한 후보'를 찍고 있을 때 캐스팅 제의가 왔는데 솔직히 부담스러웠다. 대본을 보니 우리 교육의 현실을 다룬 또 다른 '미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코 가벼운 드라마가 아닌데 왜 나를 캐스팅하려고 했는지 궁금했다. 감독님은 무표정한 내 얼굴이 극에 잘 어울릴 것 같다고 하더라.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말까지 했다. 고마웠다. 다만 비슷한 시기에 개봉과 방영이 정해져 있어, 상반된 이미지에서 오는 괴리감이 크지 않을까 걱정됐다. 다행히 양쪽 다 나름의 의미를 남기며 무사히 잘 넘어간 것 같다."

▶남들은 어렵게 생각하는 코미디 연기를 너무나 쉽고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있는데 비결이 있다면.

"절대 쉬운 건 없다. 그중에서도 사람을 웃기는 게 가장 어려운 것 같다. 사실 어떤 장르이든 내가 체력적으로 편했는지, 정신적으로 편했는지의 차이가 연기적 완성도를 좌우한다. '블랙독'은 대사량이 많지는 않았지만 표정으로 표현할 게 많다 보니 정신적인 피로도가 심했다. 반면 '막돼먹은 영애씨' '정직한 후보'는 대사량이 많아서 체력적으로 힘들었다. 장르적으로 한 쪽에 치우치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는 편인데, 코미디 장르에서 반응이 좋고 부각이 되다보니 '코믹 장인'이라는 부담스러운 타이틀을 얻게 됐다. 솔직히 그거라도 잘하면 좋은데, 코미디는 정말 너무 어렵고 힘들다."

▶평소 생각하고 있는 바람직한 정치인 상은 무엇인가.

"거짓말 안 하는 사람보다는 현명하고 바른 가치관을 지닌 사람이 정치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물론 생각만큼 자신의 뜻을 펼치는 게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꿋꿋이 헤쳐나갈 수 있는 분이라면 정말 응원해주고 싶다. 코미디만큼 힘든 게 정치인 것 같다."

▶스스로 자신의 매력을 평가해본다면.

"생긴 것도 그렇고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게 내 매력이 아닐까. 먼저 나를 낮추고 들어가면 상대방도 쉽게 마음을 열게 되는데, 그 점을 모두가 좋게 본 것 같다. 지금껏 살면서 '라미란 못됐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 없다."(웃음)

윤용섭기자 yys@yeongnam.com
사진제공 = 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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