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정약용과 경상도

  • 유선태
  • |
  • 입력 2021-01-22   |  발행일 2021-01-22 제35면   |  수정 2021-01-22
유람하며, 유배와서…茶山은 경상도 흠모하는 마음을 글로 남겼다
2021012201000543500021551
부인이 보낸 치마폭을 종이 삼아 적은 하피첩.
1정약용
오랜 유배 끝에 고향 남양주 마재로 돌아온 다산은 아내와 함께 18년을 더 살다가 75세에 세상을 떠났다. 고전·경학 저술 230권, 시문 70권, 경세·목민·의약 저술 200여권을 남겼다. 정인보는 오천년 역사에서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긴 인물이라 했다.
조선 지성사에 우뚝 선 인물 다산 정약용. 경세, 고전, 경제, 의약, 국방, 천문, 지리 등 다방면에 통달했고 조선후기 역사 수레바퀴의 참혹함 속에서도 인간의 위대함과 고귀함을 보여준 겨레의 스승이었다. 19세기 동양사의 뛰어난 인물로 그의 학문적 업적은 날이 갈수록 빛을 더해 '다산학'이라는 새로운 학술분야가 탄생했다. 10년의 짧은 관직생활과 18년의 긴 유배생활, 500여 권의 저술로 오백년 왕업에 전무후무한 인물이지만 왕조실록에는 고작 38번만 언급된다. 다산의 경상도 인연을 따라가 본다.

퇴계 위해 도산사숙록 쓰고
영남선비 격려하는 詩 읊어
신라멸망 돌아본 '계림회고'

안동 영호루선 서애 기리고
조령·죽령·추풍령 넘나들며

여러 명승지 아름다움 노래

◆다산의 경상도 유람

다산은 9세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15세에 풍산홍씨와 혼인해 28세에 출사할 때까지 아내와 함께 아버지와 장인의 임지를 오가며 경상도 곳곳에 주옥같은 시를 남겼다. 부친 정재원은 예천군수·울산부사·진주목사를 지냈고 장인 홍화보는 경상도 우병사를 역임했다. 시는 밝고 빛이 났으며 해박한 지식이 충만했다.

다산은 경상도를 사랑했다. 퇴계를 흠모해 '도산사숙록'을 지었고 중앙 진출이 어려웠던 영남 선비들에게 '산야에 묻혔다고 애석하지 마소, 영남사람 마침내는 큰 성은을 입을 터이니'라고 읊어 몇 년 뒤 일어날 정조의 영남인재 발탁을 예견했다.

울산부사인 아버지를 뵈러 가는 길에 경주 포석정에 들러 '포석정 앞 물 기운이 향기롭거늘 신라 유민들은 지금도 경애왕을 말하고 있네'라고 신라 멸망사를 '계림회고'로 남겼고, 영천 은해사에 들러 '붉은 단풍 속에 산문은 고요하고, 푸른 덩굴에 얽혀 시냇가 길 그윽하다'라 하여 조선시대 은해사 모습을 붉고 푸르게 그림처럼 묘사했다.

진주 촉석루에 올라 '단청한 기둥에는 세 장수의 옛 노래만 남았다오'라면서 임란 진주성싸움의 촉석루 삼장사를 기렸다. 합천 함벽정에서 당나라 왕유 시를 연상시키는 멋진 구절 '누워서 스님이 가는 곳을 바라보니 산 그림자 저절로 비끼었구나'를 읊었고 선산 낙동강변의 월파정에 올라 '아내와의 정이 자못 깊어 산천유람을 함께한다오'라고 아내 사랑을 이야기했다.

다산의 시에는 우리 정서가 담겨 있다. 19세 여름날에 예천 반학정에 올라 지은 절구 6수는 싱그럽기 그지없다. 이런 시가 왜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지 알 수가 없다. 이백시는 1천500수, 두보시는 1천200수가 전해오는데 다산은 1천300수를 지었다.

안동 영호루에 올라 류성룡을 그리면서 '하회고택 어디메뇨, 시대가 멀어 쓸쓸히 슬퍼하노라'. 동시대를 함께하지 못한 옛 현인을 그리워했고, 예천 선몽대에 올라 '정탁 대감이 놀던 그때 모습이 상상이 된다'고 했다. 함양박씨 세거지 예천 금당실을 방문해 영남삼로 박손경을 칭송했다. 영남관문인 조령·죽령·추풍령을 모두 넘나들며 그때마다 감회를 읊었고 성주, 영주, 영천, 울산 등 여러 명승지에 시를 남겼다.

봉화에서 과거동기 김한동과 김희주, 김희락, 이진동 등을 만나 친교를 다졌다. 봉화 바래미 의성김씨 일족인 이들은 훗날 정조에게 발탁돼 김한동은 승정원승지, 김희주는 대사간까지 올랐고, 김희락은 도산별시에 급제했고, 퇴계방손 이진동은 무신창의록의 소두였다. 김한동과 김희주는 정조치세가 5년만 더 지속되었더라면 류성룡 이후 이백년 만에 영남 정승이 되었을 인물들이다.

봉화 회합을 마치고 죽령을 넘으면서 '돌아가는 발길은 단양고을 향하는데 삼도의 구름 노을은 천천히 다가온다'며 조정의 부름을 받아 영남 유람을 끝내고 출사의 길로 들어선다.

다산을 아끼던 정조가 갑자기 승하하고 영조계비 정순왕후가 섭정하면서 천주교 탄압이 본격화되었다. 1801년 노론벽파의 신유박해로 이승훈과 정약용의 셋째형 정약종은 처형당하고 이가환·권철신이 옥사하고, 다산은 경상도 장기로, 둘째형 정약전은 전라도 신지도로 유배된다. 처형당한 이승훈은 매형이고 정약종은 셋째형, 이가환과 권철신은 절친이다. 장기로 유배 가던 도중 다산은 충주 하담의 부모 산소에 들러 통곡을 한다. 옥당에 빛나는 우리 가문이 어찌 이렇게 멸문의 화를 당했는지, 나이 40세에 꺾여버린 인생사를 절망한다.

포항 장기로 유배됐을 때엔
관리 전횡 꼬집는 농가 짓고
시골사람들 위해 醫書까지

오랜 귀양살이로 못한 父역할
아내가 보낸 치마에 글 적어
교훈 담긴 서첩 '하피첩' 전해


◆장기에서의 유배생활

장기는 감포와 구룡포 중간에 있는 해안고을로 조선왕조의 단골 유배지다. 왕조 오백년 동안 211명이 귀양살이했고 최근 포항시에서 유배문화 체험촌을 만들었다. 다산의 거주지는 장기초등 자리의 늙은 군교(관아군무담당) 성선봉 집이었다. 귀양살이는 첫해가 가장 어려운데 이때 쓴 다산의 글은 고통과 울분으로 얼룩졌다가 점차 안정을 찾는다. '작고 작은 나의 일곱 자 몸, 사방 한 길의 방에도 누울 수 있네. 아침에 일어나다 머리를 찧지만 밤에 쓰러지면 무릎은 펼 수 있다네.'

장기 농가(農歌) 10장을 지어 백성의 어려움과 함께하며 관리의 전횡을 꼬집는다. '상추쌈에 보리밥을 둥글게 싸 먹고 고추장에 파뿌리만 곁들인다네. 금년에 넙치마저 구하기 어려운 것은 모조리 건포 만들어 관가에 바쳤기 때문.'

어민들이 칡넝쿨로 어렵게 고기를 잡는 모습을 보고 명주 그물을 소개해 주고 포항 사투리가 점차 정이 들 무렵 시골사람들을 위해 의서 '촌병혹치'를 만들었다. 집에서 보내준 의서와 본초강목을 바탕으로 40여 가지 간략 치료법이지만 실전되고 서문만 전한다.

장기 선비들은 120년 전 이곳에서 3년7개월간 귀양살이한 송시열을 추앙하고 있었다. 인근 죽림서원을 찾았는데 이곳 촌로들은 아직도 우암만 노래하고 있다고 불편한 심사를 나타냈다. 장기잡수 27수 등 130여 수의 시와 6권의 저술을 짓고 그해 가을 황사영 백서사건이 터지자 다시 의금부로 끌려가 장기 유배는 7개월 만에 끝나게 된다.

◆하피첩 이야기

황사영은 큰형 정약현의 맏사위다. 백서(帛書·비단에 쓴 글)는 가로 62㎝ 세로 38㎝ 명주 천에 1만3천384자를 깨알처럼 써서 천주교 북경교구장에게 보내는 호소문인데 외세 개입을 청하는 내용이 있어 대역죄인으로 참형을 당한다. 친모는 거제도로 유배 가고 처삼촌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이배된다. 아내 정난주는 제주도 대정현 관비(官婢)로 떨어지는데 정난주는 두 살배기 아들을 추자도에 내려놓고 제주도로 가서 관비로 일생을 마치지만 품격있는 삶으로 대정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는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고 2년 뒤 추사 김정희가 대정현으로 유배 온다.

다산은 강진 유배 동안 불후의 저술을 남김으로써 그의 위대함이 훗날 알려지지만 가장 애틋한 사연은 아내의 '하피(붉은치마)' 이야기다. 귀양살이 10년에 접어든 1810년, 아내는 남편 생각이 간절하나 유배지에 갈 수 없으므로 시집 올 때 가지고 왔던 붉은 치마 다섯 폭을 보낸다. 붉은 빛은 흐려지고 노란 빛은 옅어져 글씨 쓰기에 알맞았으므로 다산은 이것을 잘라 아이들에게 교훈이 될 만한 글을 적어 작은 서첩을 만들었는데 이를 '하피첩'이라 했다.

10년 귀양살이에 훌쩍 큰 아들에게 아버지 역할을 하지 못한 아쉬움과 훗날 자식들이 이 글을 보고 '부모 흔적과 손때를 생각하며 그리워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라고 서문에 밝혔다. 3년 뒤 어린 딸이 어느새 자라 시집갈 때 남은 하피로 매조도(梅鳥圖)도 그려 보낸다.

하피첩은 본래 4첩이었으나 3첩만 전해온다. 대대로 후손 집안에 전해왔는데 6·25전쟁 때 분실되었고 2004년 수원에서 폐지 줍던 할머니의 리어카에 있던 것을 한 시민이 취득했다가 2006년 KBS 진품명품에 나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다시 행방이 묘연해졌다가 2015년 경매시장에 나온 걸 정부가 구입해 문화재로 선정했다.
2021012201000543500021554
순조 이후 조선사에서 사라진 다산을 다시 세상에 알린 인물은 영남 출신 언론인 장지연이다. 1934~38년 다산 서거 100주년에 즈음해 정인보와 안재홍이 교열한 금속활자본으로는 처음 펴낸 '여유당전서'. 1970년대 초에 서울 고서점에서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이 입수해 세상에 알리게 된다.
◆다산의 재발견

다산은 왜 18년 동안 귀양살이 했을까? 노론 조정에 우군세력이 전멸했고 무엇보다 서용보와 악연이 가장 컸다. 다산이 33세에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관찰사 서용보를 탄핵하면서 악연이 시작되었다. 서용보는 노론 벌열 가문 대구서씨 출신으로 열일곱에 대과급제해 영의정에 오른 인물이다. 다산은 자찬묘지명에서 서용보와 악연을 여러 번 언급했다. 신유박해 때 서용보가 고집해 장기로 유배되었던 일, 1803년 정순왕후가 해배를 명했지만 서용보가 거부한 일, 1810년 방축향리를 명했으나 의금부가 막은 일, 1819년 조정에서 다시 다산을 승지로 등용하려 했으나 서용보가 저지한 일이다.

고향 남양주 마재로 돌아온 다산은 아내와 함께 18년을 더 살다가 75세에 세상을 떠났다. 고전·경학 저술 230권, 시문 70권, 경세·목민·의약 저술 200여 권을 남겼다. 정인보는 오천년 역사에서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긴 인물이라 했다.

순조 이후 조선사에서 사라진 다산을 다시 세상에 알린 인물은 영남 출신 언론인 장지연이다. 사후 60여 년이 지난 1899년,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4회 걸쳐 여유당문집과 목민심서를 소개함으로써 다산의 이름을 식자층에 회자시켰다. 나라가 빼앗기기 직전 1910년 7월에 조정은 증직벼슬과 시호를 내렸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본가가 떠내려가 유고가 유실될 뻔했으나 현손 정규영이 극적으로 구해내 보존했다.

2021012201000543500021553
서거 100주년을 즈음해 1934년 정인보와 안재홍의 주도로 문집 간행 논의가 일어난다. 1938년 신조선사에서 영남유림 등의 도움을 받아 활자본 여유당전서 76책 154권이 발간된다. 영남 남인은 다산과 동병상련의 아픔이 있었다. 다산이 정조 치하 영남 인재 발굴에 도움을 주었으므로 영남 유림은 기꺼이 재정 지원에 동참한 탓에 다산 유고가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여행작가·역사연구가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위클리포유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