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뉴스] 조선 숙종임금 하사한 대구 유일의 마을이름 동구 대명동을 아시나요?

  • 박종문
  • |
  • 입력 2021-02-02   |  발행일 2021-02-03 제12면   |  수정 2021-02-02
3525.jpg
대구 동구 도동 한이골에 있는 '14현 대명동유적비 (十四賢大明洞遺跡碑)'.
대구 동구 도평동 행정복지센터에서 불로천을 따라 상류쪽으로 10분정도 걸어가면 대진하우징이라는 건물이 나온다. 이 건물 인근 산 아래 '14현 대명동유적비 (十四賢大明洞遺跡碑)'가 있다.

이곳이 대구의 두문동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하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개경의 한 골짜기 두문동에 두문불출(杜門不出)하는 사람들을 '두문동 72현'이라고 한다. 대구의 두문동인 이곳의 대명동은 시기와 명분을 달리하지만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는 지조와 절의를 간직한 장소이다.

1636년 12월 청나라는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략했다. 이 전쟁은 결국 인조가 성을 나와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항복 함으로써 마무리가 되었지만 명의 연호와 국교를 끊고 봉림대군과 많은 인질이 끌려 가야했고 매년 청나라에 조공을 하는 등의 굴욕적인 조건으로 끝났다. 결국 세력이 강해진 청은 명나라까지 멸망시켰는데 이에 조선의 많은 선비들은 임진 왜란때 도와준 명에 대한 의리를 잊지 못하고 청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대구의 사림들 중에서도 친명파 14명은 '남영사(南寧社)'라는 조직을 결성하고 임진왜란때 의병장으로 활동한 최인이 개척한 대구 동구 도동의 한이골 (汗耳골)골짜기에 들어가서 마을이름을'명동 (明洞)'이라하고 반청활동을 전개 하였다. 이들은 최인의 장손 최도남과 이언적, 전극초, 정기, 허계, 서장태, 채생만, 양시좌, 도신행, 류여장, 이찬, 임이현, 우석련, 여위흥이었다. 그들은 그 골짜기에서 집단생활을 하며 1640년(인조18)부터 1700년 (숙종)까지 60년 동안 반청활동을 하였다.

그 후 최인의 둘째손자 휴헌 최진남이 문과에 급제하고 뒤를 이어 휴헌의 아들 명곡 최경식 또한 대과에 급제하여 조회에 참석하니 숙종임금이 "너희아비 가 명동이라 하였거늘 너 또한 참으로 가상하다"하며 친히 '대명동(大明洞)' 이라는 마을이름 세 글자를 써서 하사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은 250년이 지난 1928년 전극초의 후손이 집안에 보관하던 기록을 발견하므로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세월의 흐름 따라 달리 볼 수도 있겠지만 당시의 시대상황에서 명에 대한 의리와 사림의 지조를 지키기 위해 평생을 저항 속에서 살아온 조상들의 기록이고 왕도 칭찬해 마지않았던 대구지역 사림들의 절개를 더 이상 잡초 속에서 방치 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명나라 귀화장수 두사충이 머물렀던 남구 대명동은 법정동으로써 아직도 그 이름을 유지하는데 의병장이 개척한 장소이며 왕이 하사한 대구 유일의 마을이름을 이대로 방치하는 것은 후손된 도리가 아닐 것 같다.

사료를 찾아 보내온 향토사학자 이정웅씨는 "명분과 의리를 중시했던 이런 분들의 저항 정신이 오늘날 국채 보상운동이나, 2·28의거로 연결될 수 있었음을 감안 한다면 이러한 사실을 알리는 안내판이라도 설치되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을 전했다.

박종문기자 kpjm@yeongnam.com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시민기자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