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호기자의 행간을 찍다] 꽃도 잎도 아닌…

  • 이춘호
  • |
  • 입력 2021-03-05   |  발행일 2021-03-05 제35면   |  수정 2021-03-05

2021030501000000300037501

2월의 휑한 정원. 쪼그려 앉아 멍하니 땅을 바라본다. 한쪽에선 봄바람, 반대쪽에선 겨울바람이다. 가는 겨울, 그리고 오는 봄. 계절의 정권교체인가?

계절도 하나의 '권력'일까? 그럼, 계절의 포장지는 자연이겠고, 그 자연의 4대 천황은 봄여름가을겨울. 한번씩 틈입하는 태풍, 가뭄, 홍수, 산불 같은 것. 그걸 쿠데타·혁명일까?

겨울 위에 봄이 포개지는 방식 역시 자못 혁명적이다. 가는 겨울이 아니, 오는 봄이 강자인가. 모르긴 해도 그건 우열이 아니라 '변화의 방식' 아닌가?

어떻게 겨울의 공간이 봄이 된단 말인가? 아니, 어떻게 밤의 허공에 아침이 올 수 있는가. 하늘과 땅의 이치를 '천지(天地)'로 묶었던 현인들의 안목. 하지만 난 그 안목이 고답스럽고 부담스럽다. 천지란 단어는 인간사에 잘못 개입되면 대략난감해진다. 천지 옆에 음양이란 단어까지 장착되면 허세와 욕망은 혹세무민으로 기운다.

다시 자연에게 질문한다. 뭣 하러 잎과 꽃을 줬다가 일순간 겨울이란 방식으로 그 잎과 꽃을 다 가져버리는가? 사철 푸른 소나무와 대나무, 흙이 없어도 사는 수생식물, 비가 안 와도 멀쩡한 이끼…. 도대체 이런 스페셜한 생리는 뭣하러 생겨났지?

살리는 구역이 있고 죽이는 구역도 있다. 백척간두까지는 '생(生)'이다. 그런데 진일보(進一步)는 '죽음(死)'이다. 저렇게 멋진 절벽이지만 그는 제 몸속에 죽음의 높이를 숨겨 놓았다.

2021030501000000300037502

물속에 머리를 집어넣고 얼마나 오래 버티는가를 실험해 본 적이 많다. 1분은 능히 참을 수 있는데 이후 1초는 까마득한 파워로 날 구겨놓는다. 살려는 그 힘으로 숨통을 억지로 막아버렸는데 결국은 살려는 힘이 머리를 물밖으로 내놓게 만든다. 하지만 그건 '죽음 코스프레'다. 실제 일상이란 전장에 나오면 상황이 완전 달라진다. 파산, 배신, 우울, 절망 등은 쉽게 삶의 근육을 죽음의 근육으로 바꿔놓는다. 지금도 자살을 삶의 묘수라 여기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겨울잠에 취한 모란의 냉랭한 줄기를 잘라 내 책상 위로 갖고 왔다. 유리컵에 물을 붓고 가지를 집어넣었다. 몸살 탓인지 총알 모양으로 뭉쳐진 잎이 7일 정도 인기척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다음날 아침, 봉오리가 여러 갈래로 벌어지기 시작한다. 그놈은 물을 수액으로 위안한다. '실험실의 봄'인가? 아무튼 녀석은 깁스해놓았던 망울을 하나씩 푼다. 아직 저 가지는 비몽사몽. 꽃인지 잎인지 아리송한 지경이다.

소읍의 버스정류장처럼 서성거리는 2월. 그 외진 골목의 그늘은 3월의 수식어로 매달린다. 하여 2월의 골목은 말줄임표로 사는 백수 같은 중년의 굽은 등에 썩 잘 어울린다.

2월의 빈집을 아시는가. 죽은 기형도 시인은 그걸 알았다지. 그 우물에 드리워진 바람과 낮달, 그걸 내려다보는 길고양이. 그걸 풍류라 여기는 이태백 정도면 능청스럽게 낮술 삼매경이라도 용서될 거야.

배달(남의 길)이란 최면에 걸린 코로나의 시민들이여! 그대는 더 이상 삶이란 잣대로 이해되긴 틀린 것 같다.

글·사진=이춘호 음식·대중문화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위클리포유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