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규완 칼럼] 대구와 삼성의 緣, 그리고 '이건희 미술관'

  • 박규완
  • |
  • 입력 2021-05-13   |  발행일 2021-05-13 제22면   |  수정 2021-05-13 07:20
삼성 발상지·이건희 출생지
삼성라이온즈 연고지 대구
인연 중시하는 한국인 정서
딴 데 가면 '정치적 잣대'
투자외면 삼성, 응답할 기회

2021051201000346800013361
논설위원

"인연이 그런 것이란다. 억지로는 안되어. 아무리 애가 타도 앞당겨 끄집어 올 수 없고, 아무리 서둘러서 다른 데로 가려 해도 달아날 수 없고잉" 최명희 소설 '혼불'에 나오는 대목인데 마치 '인연 설명서' 같다. 피천득의 수필 '인연'은 작가가 17세 때 처음 만난 하숙집 딸 아사코와의 연(緣)에 대한 고백서다. 그녀와 세 번의 조우(遭遇)를 순수하면서도 곰삭은 감성으로 녹여낸다. '길에 있는 돌도 연분이 있어야 찬다'는 우리 속담은 또 어떤가. 연(緣)을 중시하는 한국인의 정서가 오롯이 드러난다.

'이건희 미술관' 유치전이 후끈하다. 미술관 유치에 나선 지자체들은 저마다 당위성을 강조한다. 부산은 지역균형발전, 광주는 예향을 내세우고 세종시는 행정수도란 상징성을 표방한다. 그래도 삼성과의 연(緣)을 언급하는 지자체에 더 눈길이 간다. 수원시는 삼성전자 본사와 이건희 회장의 묘소가 있다는 점을 내세우고, 경남 의령군은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출생지임을 강조한다.

하지만 삼성과의 인연 하면 단연 대구가 그랑프리다. 다른 곳과는 급(級)이 다르다. 첫째, 대구는 삼성그룹의 발상지다.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1938년 대구 중구 인교동에서 문을 연 삼성상회가 글로벌 삼성의 모태다. 둘째, 대구는 이건희 회장의 출생지다. 이건희는 1942년 인교동에서 태어났다. 셋째, 대구는 프로야구 삼성라이온즈의 연고지다. 이건희 회장은 1982년부터 2001년까지 삼성라이온즈 구단주를 맡을 만큼 '삼성 야구'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올해 삼성 야구는 간만에 '왕조 부활'의 향기를 물씬 풍긴다.

명색이 '이건희 미술관'이다. 그 미술관을 채울 작품은 '이건희 컬렉션'이다. 대구는 이건희 출생지이자 삼성의 발상지이며 삼성라이온즈 연고지다. '이건희 미술관'이 대구에 오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한 거다. 객관적으로만 평가하면 당연히 대구다. 여느 국책사업처럼 또 '정치적 잣대'를 들이대면 몰라도.

게다가 대구엔 문화예술 아우라가 있다. 대구는 근대 미술의 태동지였고 근현대 문학을 꽃피운 땅이었다. 천재 화가 이쾌대와 이인성을 낳았으며, 이상화·현진건 같은 걸출한 문인을 배출했다. 대중음악사의 한 획을 그은 곳이기도 하다. 말인즉슨 문화적 토양이 양질이라는 거다. 문화 아우라가 없는 도시에 '이건희 미술관'을 보낼 순 없다. 그렇다고 수도권? 수도권엔 문화시설이 너무 많아 과부하가 걸릴 지경이다.

'이건희 미술관'의 입지는 정부가 정할 테지만, 삼성가의 의중이 주요 변수다. 그동안 대구시는 삼성의 대구 투자를 위해 꽤나 공을 들였다. 2010년엔 호암(이병철 창업주의 호) 탄생 100주년 행사를 개최했고, 중구 인교동 삼성상회 터를 삼성 기념공간으로 복원했다. 북구 옛 제일모직 앞 도로를 '호암로'로 명명하고 호암 동상도 세웠다. 하지만 시장주의 우선의 삼성은 대구를 투자 시계(視界)에서 제외했다. 대구시민이라면 삼성에 대한 일말의 섭섭함이 있을 법하다. 하지만 이제 '이건희 미술관' 하나면 족하다.

고작 미술관 하나로 대구가 달라질까. 스페인 빌바오에 답이 있다. 쇠락해가던 공업도시 빌바오를 세계적 관광도시로 끌어올린 동력이 구겐하임 미술관이다. '이건희 미술관'은 콘텐츠가 충실하다. 이름만 들어도 마음 설렐 명작들로 그득하다. 여기에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같은 명품 건축물을 세운다고 가정해보라. 대구가 관광명소로 뜰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다. 대구시는 '이건희 미술관' 유치에 명운을 걸어라.
논설위원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오피니언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